한국일보

기차에 몸을 담고

2009-08-06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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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설자 워싱턴여류수필가협회

일주일간의 오붓한 만남의 시간을 보내고 내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뉴욕으로 이어지는 앰트랙 79번 기차가 ‘뿌우웅’ 기적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간이역(驛)으로 들어온다. 작은 딸네의 배웅을 받으며 기차에 올랐다.
짐 가방을 선반에 올리느라 끙끙대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건너편에 앉아있던 백인 청년이 친절하게 다가와 도와준다. 텅텅 빈 차창 쪽으로 자리를 정하고 앉자 요람을 흔드는 것처럼 기차는 흔들흔들 삐꺼덕 소리를 내면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철길 옆 화단에 핀 작은 꽃들도 배웅한다고 손을 흔들고 뭉게구름은 기차를 쫓아오느라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 띄엄띄엄 앉은 승객들은 스쳐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만 열심히 바라보며 침묵하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눈을 감고 명상하는 사람, 식당차에서 음식을 사서 나르는 사람 등 승객들의 마음도 각양각색이리라.
창밖의 자연은 자기의 역할을 말없이 한껏 검푸른 싱그러움을 펼쳐내고 있다. 널따랗게 펼쳐진 옥수수 밭, 질서정연하게 심겨진 감자, 고구마, 콩밭을 온통 뒤덮은 풍성한 푸르름이 바람에 살랑인다. 덜커덩 덜컹 속력을 내며 달리는 차창 밖 눈부신 햇살에 잘게 부서져 내리는 은빛 호수가 느닷없이 나타나기도 하고 또 수면위로 길게 드리워진 나주막한 산 그림자가 파노라마처럼 길게 길게 펼쳐져 있어 감상하는 멋이 일품이다.
그런데 갑자기 어릴 적 기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50여 년 전 1.4후퇴 때 피난길, 좁은 공간에 수많은 피난민들이 겹겹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기약도 없이 쉬었다 달렸다 반복하며 달리는 화물기차 꼭대기에 몇 날 몇 일을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며 간 곳이 대구였다. 가야할 곳은 부산인데 대구까지 만의 종점이었는지는 몰랐어도 추위에 떨며 대합실 모퉁이에 서있는 우리가족을 발견한 역승무원은 친절하게도 하얀 김을 마구 뿜어대는 기차칸으로 안내해주었다. 편하게 육중한 몸뚱아릴 씩씩대며 질주하는 그 검은 야생마를 타고 부산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는 행운에 감사함을 잊지 못한다.
우린 시장 한 귀퉁이에 솥 걸어놓고 밥을 지어먹던 아련한 추억속의 흑백 사진속의 기차. 까마득한 옛날을 생각하니 그 절절한 향수가, 유년기의 추억잔향이 눈물겹다. 그러나 그 유년의 시절엔 부끄러움도 모르는 철없는 즐거움도 있었고, 고국을 떠나 이민의 고달픈 삶을 살면서 때때로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 찾아왔어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신앙심이 큰 힘이 되어 주었기에 오늘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위기를 내게 주어진 또 하나의 기회로 보거나 과거와 현재의 삶을 성찰하고 자각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으며 신앙생활에서 얻어지는 긍정적인 사고와 태도는 우리의 정신건강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가족화목과 건강한 대인관계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함을 깨닫게 됨에 고마워한다.
아홉 시간 반이나 기차에 몸을 담고 호젓함 속에서 책을 읽으며 일상의 군더더기 없이 자유함과 평화로움 속에서 짚어본 지난 일들은 되돌아 갈 수 없는 저편의 세계이기에 소중한 것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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