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저씨라 불러주세요

2009-07-29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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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김은 요즈음 누가 나이를 물으면 59세인 자기 나이를 바로 대지 않고 ‘그냥 50대 인데요’ 라고 한다. 남도 다 넘어가는 나이고개라는데 이상하게 자기만 떠밀려 더 빨리 가고 있는 느낌은 왠일인지 모르겠다.
요즈음 직장을 고만두고 그는 아내의 옷가게 일을 도와주고 있다. 어느 날 아내대신 혼자 가게를 보고 있는데, 아마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들어오더니 대뜸 하는 말이 “할아버지 이 옷 싸게 안되요?” 라고 물었다. 그는 속으로 ‘나를 할아버지라고 불러놓고 싸게 사기를 바라신다... 내가 아무리 내 나이보다 겉늙어 보여도 아직은 59세인데, 아저씨라고 불러주면 세금 붙나...’ 워낙 급한 성격에다 다혈질인 그는 화가 턱 밑에까지 치밀어 쉰 목소리로 “아마 안 될걸요” 라고 말했다.
여자는 “이집 주인 노처녀 아가씨는 20%는 디씨(디스카운트) 해주는데, 나중에 다시 와야겠네” 라며 그의 화통을 찔러놓고 훌쩍 가버렸다. 그와 나이 차이가 8년이나 나는 아내는 얼굴도 동안인데다 키마저 자그마해서 자기 나이보다 항상 젊게 보였다.
어쩌다 둘이 외출이라도 하면 사람들은 다정한 부녀나 불륜 사이로 보는 적도 많았다. 이상하게 그는 50이 지나면서 거울을 자주보기 싫더니, 요즘은 아예 거울보기를 싫어했다.
‘마누라가 나 잘생겼다고 쫓아오던 그 젊던 핸섬남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무리 좋은 남자 화장품을 겹겹이 발라도 소용이 없으니 이 사실을 누구에게 하소연하랴’.
어느 화창한 날 아침, 가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데 한 여자 손님이 들어왔다. 물건을 잠시 보는 척 하더니 불쑥 묻기를 “저... 여기 사장님하고는 어떤 사이세요 ?” 참말로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었다. ‘아니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지... 아니, 남의 가게에 왔으면 물건이나 사면되지 무엇 때문에 내 젊은 마누라와 내 신원, 호구 조사까지 하려는지... 정 궁금하면 우리 마누라한테 물어보지, 아껴두었다가 지금 왜 내 속을 뒤집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그는 울컥 하는 다혈질적인 마음을 누르며 “이집 사장은 내 큰 며느리인데요”라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그럼 그렇지...”라며 여자는 가게를 나갔다.
한참 열불이 나 있는데, 미장원에서 염색도 하시고 탤런트처럼 한껏 모양을 내신 이 가게 여사장님(마누라)이 배시시 웃으며 들어선다.
남편의 얼굴을 찬찬히 보던 아내는 불어터진 속을 용케 알아차리고, “꼭 요강 뚜껑에 물먹은 사람 얼굴이네, 누가 또 당신보고 할배라고 불렀나봐”라고 하는 것이다.
할배라 부르는 아내가 갑작이 더 밉고, 속으로 ‘아까 그 여자한테 큰 며느리 대신 첩이라고 할 걸 하고 후회했다. 그러면 그 입빠른 여자는 온 한인타운을 누비며 생방송하느라 바쁠 테고, 기세당당한 저 마누라도 기가 좀 꺾이지 않을까...‘진주 목걸이도 젊은 목에 걸어야 더 아름답다던데... 아이고 젊은 청춘은 어디로 가고 불 꺼진 항구로 가고 있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누가 말했는지 그야말로 복음과 같은 소리다. 늦게 결혼한 그는 아직 손자가 없다. 그래서 그는 아직 할아버지가 아니다. 하기는 그 옛날 공자, 맹자, 부처님, 예수님도 생로병사를 해결하지 못하고 모두 돌아가셨지 않은가.
앞으로 나이 지긋한 남자 분을 보면 하루가 행복할 수 있게 할아버지 대신, 아저씨라 불러 주세요. 왜냐하면 나이 먹은 남자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할아버지니까요.

이혜란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미주 동부 지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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