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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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의 일기/ 나라잃은 어린 나그네 (12)

2009-06-2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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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홀로 남아 인생의 뜨개질을...

못다한 이야기(그 후 이야기)

1946년 5월4일
2일 아침 10시쯤 해서 부산항에 상륙하여 난민수용소로 들어가 이틀 밤을 지냈다. 그리고 행리를 찾아가지고 기차를 타고 경성으로 향했다. 지난 2월 중순에 남경서 상해를 향해 떠나올 때 화차를 타려고 수많은 군중이 역에서 기다리고 차를 타기 위해 화차 꼭대기에 올라타고 오는 광경을 보고 놀랬더니 본국의 현상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기차에 올라타고 그리던 서울로 향한 것이다.

1946년 5월5일
새벽때쯤 해서 공간을 얻어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기차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여 일어나서 문을 여니 양소벽 찾으시는 분이 몇 분 계시다고 한다.
일어나 눈을 부비고 보니 ‘누님’ 하며 부르며 팔을 벌리는 두 남동생! 11년이란 세월에 피차 많이 달려졌으나 모습만은 여전하다. ‘형님, 지금서야 오셨습니까?’하고 공손히 절하는 제시 삼촌! 고장이 생겨 용산역에서 머무르고 있는 기차를 알아본 결과, 한두 시간 후에야 떠난다고 하니 지금 이곳서 내리는 것이 좋다고 하여 용산역에 내려서 전차를 타고 남산공원 밑 ‘소복 여관’으
로 인도되어 갔다. ‘소복여관’은 큰 여관이지만, 욕실이 고장이 나서 사용을 못한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큰 외삼촌댁으로 가서 전 식구가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한 후, 아버지께서는 다시 여관으로 가시고 세 모녀는 아저씨댁에 머물러 있게 됐다. 첫째 외숙은 흥국, 둘째 외숙은 흥조다.


1946년 5월27일 수요일
제시는 남산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키고, 한미호텔(충무로 2가에 위치한 사오 층 건물로, 임시 정부 요인들이 유숙하고 계셨다)에 아버지와 같이 유숙하면서 학교엘 다니기로 했다. 한미 호텔 방이 얻어질 때까지 어머니는 제니를 데리고 태평로 큰 회삼촌 댁에 임시로 계실 것이다.

1946년 6월2일
며칠 전 장티푸스 예방주사를 맞고 엄마와 아빠가 모두 하루 앓았는데 오늘은 전 식구가 호열자 예방주사를 맞았다. 제시는 매일같이 재미있어 하며 학교엘 다니고, 제니는 집에서 잘 놀고 있다.

1946년 6월27일 목요일
지난 20일부터 내리는 비가 계속되고 있는데 남쪽 지방엔 수재가 심한 모양이다. 어머니께서는 지난 6월12일부터 경성 의전 부속병원에 X-Ray 광선치료를 다니시는데 요즘 연일 내리는 비 때문에 치료를 못 받으시고 답답한대로 작년 이후로 보관해 둔 신문을 보시는 것으로 날을 보내시는 모양이다. 십여 일 전쯤 해서 황해도 해주서 삼팔선을 모험해 넘어온 엄마의 셋째 외삼촌 흥두 아저씨가 오셔서 외할머니와 할아버지 소식을 잘 들어 알게 되었고 친척 소식도 대강 들어 알게 되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곧 뵈러 가야 할 텐데…


오늘에 하는 말
1999년 4월19일 대한민국 경기도 분당

이제는 손주들에게 하는 옛날이야기의 한 가지 소재가 되어버린 그 시절, 우리나라의 독립을 바라던 그 시간들…
먼저 내 얘기를 소중하게 읽고 들어준 내 손주, 현주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다른 손주들에게도 이 이야기를 전해주겠다며 열심이던 아이. 나 또한 그 시간들을 다시 이야기하며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지치고 힘겨웠던 기억이라기보다 소중하고, 흥미 있는 이야깃거리가 되어버린 그 시절 이야기를 기억하고 정리하고, 이야기하면서 마음은 어느새 그 시절로 되돌아갔다. 그 시절 함께 했던 사람들, 하지만 이제는 그 시절을 함께 나눌 사람마저도 찾을 수 없다.

나도 어느새 기억이 가물거리고, 눈앞이 침침하고, 다리, 허리가 아파오는 것이 그 옛날 내가 봤던 노인들처럼 되어가고 있다.l 남은 건 그나마 내 머릿속에 남은 자꾸 흐려져 가는 기억들이고, 전해줄 건 그 시절 이야기분이 되어버린 나는 하지만 그 역할을 즐겁게 하고 싶다. 그저 최선을 다하고, 하루하루 내 앞에 놓인 과제들을 열심히 해결하려고 했으며 그토록 바라던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 살았던 그 시절을 나는 남겨둘 수 있어 기쁘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의 이야기지만, 그것은 그 시절을 살았던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기억이기도 했다. 그들도 떠나온 곳, 가지고 있는 것이 달랐을지라도 나의 중국 시절과 같은 삶을 살았다. 일본군을 피해 중국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어느 대나무밭 근처에 우리를 실은 배가 멈췄던 기억이 난다. 배 여행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우리는 근처 대나무밭에 가서 대나무를 꺾어왔다.

그 대를 칼로 깎아 대바늘을 만들고, 사십여 일이 넘는 긴 여행길 동안 뜨개질을 시작했다. 저마다 배 구석구석에 모여앉아 대바늘로 뜨개질을 하던 아낙들. 그들과 나눴던 담소가 지금도 생생하다. 그후, 우리는 중국생활이 끝나는 날까지 틈이 날 때마다 뜨개질을 하곤 했다. 그네들과 함께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객지 생활에서 끝없이 해나가던 뜨개질. 이제 나만이 남아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인생을 뜨개질하고 있다. 일본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순간 가슴이 답답해 오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후, 그렇게 해오던 뜨개질을 멈
췄었다.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그 순간처럼 언젠가 이생의 뜨개질을 마지막으로 마무리할 때, 나는 다시 그런 경험을 하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나는 다시 솟아오르는 기쁨을 맛볼 것으로 믿는다. 그것은 먼저 간 제시 아버지에게, 함께 살았던 사람들에게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간다는 안도감이 있기 때문이다.

■임정 식구들의 생계 방편은…

임시 정부 요인들과 그 가족들은 식구 수에 따라 월급이 지급되었고 중국 정부로부터 평가미를 배급받아 먹었는데 일반미에 비해 질이 안 좋았다. 쌀을 무게로 달아 정량만 배급하는데 쌀을 빼고 대신 물을 부어 살짝 발효된 쌀을 먹게 되는 것이었다. 맛은 물론이요, 결코 양질의 영양공급을 받을 수는 없었다. 월급의 수준도 미주 지역 해외 교포들의 지원과 ‘중국 정부의 지원’에 의한 것이었기에 풍족한 살림일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유가 있었다. 물론 국내에서 일본의 압제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고 있는 지사들에 비하면 임정 식구들은 나은 편이었다.

중국 정부의 지원
임시 정부의 상해 시절, 중국 정부는 일부 관리들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한인 독립운동을 지원해왔다. 윤봉길 의거 이후에는 정부 차원에서 비밀리에 한인 독립운동을 지원하다가 중일전쟁을 계기로 재정, 군사, 외교의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고 공식적이며 강도 높은 지원을 제공했다. 중국 민간 단체와 민간 인사들도 물심 양면으로 지원한 것은 물론이다. 많은 한인이 중국 정부를 위해 일하거나 중국 군대에 소속되어 중일 전쟁을 치르는 등 다방면에서 중국을 위해 기여하고 있는 것을 인정한 결과였다.

중국 정부는 같은 적을 둔 동지국으로서 또, 국제사회에 한국의 임시 정부를 보호하고 있다는 명분과 중국 국내에 임시 정부를 둠으로써 힘을 모으기 위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전략과도 맞아떨어지기에 임시 정부와 국민당 정부와의 공조 및 임시 정부에 대한 식량과 자원 지원을 계속했다.


할머니가 말하는 도산 선생

중국으로 건너오기 전, 서울에 있을 때였다. 상해 간호전문대학으로 유학가는 것으로 사무절차를 마치고 입학 허가증까지 가지고 중국으로 갈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였다. 소벽(할아버지)은 나에게 떠나오기 전, 서울에 계시는 도산 선생을 만나 전갈을 전해 듣고 오라는 기별을 보냈다. 미국에서부터 흥사단 소속으로 활동했던 소벽에게 도산 선생님은 아버지요, 선생님과도 같은 분이셨다. 나는 어렵지만 소벽이 준 전화번호를 가지고 그분에게 전화를 했고, 일경의 눈을 피해 도망자 생활을 하고 있던 도산 선생님을 어렵사리 종로의 어느 찻집에서 나를 만나기로 하셨다.

소벽이 가장 존경하는 분이요, 민족의 정신적 스승과 같은 도산 선생님을 만나 뵙는 것이기에 설레이는 마음으로 찻집에 들어가니 도산 선생님은 다른 동지들의 보호를 받으며 소박한 모습으로 앉아 계셨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도산 선생님은 별다른 전갈은 없으며 그저 하던 대로 계속 해가라‘고 전해 달라 하셨다. 그렇게 비밀스런 만남으로 딱 한 번 뵈었던 도산 선생, 말 수 없는 점잖은 모습에 일본 경찰들에게 많이 시달리신 탓인지 약간 지친 듯한 모습이셨던 분, 민족을 위해 노력하셨던 그분을 임정 가족들은 늘 잊지 못하였다.
<끝>
HSPACE=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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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부부였던 양우조·최선화가 쓴 ‘제시의 일기’의 주인공 제시. 그의 딸 김현주(샌프란시스코 거주)씨가 할머니(최선화)씨의 이야기와 제시 양육일기를 묶어 책으로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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