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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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의 일기/ 나라잃은 어린 나그네 (11)

2009-06-2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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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조국 만들고 지키는 일 남아있어

광복의 그날이 오다

1945년 8월19일
상오 10시(미국 샌프란시스코 시간)에 일본이 무조건적으로 도맹국에 투항했다는 소식이 중경에 도착한 것은 오늘 10일 저녁 8시쯤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웬일인가 밖을 내다보니 사람들이 일본이 망했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오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이다. 가슴이 뒤고, 너무 어지러워 자리에 가서 잠시 누워야 할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일본의 패망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었다. 세상은 밤을 새워가며 미칠 듯이 좋아라고 야단을 한다. 그러나 웬심인지 우리나라 사람들(한국교포들)은 나와 같은 맘인지 다들 멍하여 가지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이다. 계속 발표되는 방송을 들으며 착잡한 생각에 밤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제시와 제니도 어머니와 같이 방송을 듣고 그저 좋다고 하며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있었다. 제시의 물음이 ‘왜놈이 망했으니 우리 인제는 할머니, 할아버지 게신데 가게 되는 것이지요?’라고 한다. 그 물을 듣고 나니 본국이 그리워지며 부모님, 형제들, 친구들의 모습이 번갈아가며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1945년 8월13일
몹시 무더운 날씨다. 얼굴과 몸에 땀띠가 나기 시작한다. 이것이 금년으로는 마지막 더위인 듯하다. 중경에 거주하는 좁은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매일 각종 회의가 열리고 있다. 모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아무러한 구체적 결정이 있을 때는 아니다. 어떠한 방면에서 듣건대 우리나라에 탁치제도를 쓰기로 벌써 결정이 되었다는 말도 들리고 있다. 아, 이것이 과연 사실이라면 우리 전 민족, 더구나 해외에서 독립운동하러 다니던 이들의 목적과는 너무도 심한 차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회의가 많은가 보다!


1945년 8월28일
십여 일간이나 뜨겁게 덥던 일기도 서너번의 소나기에 퍽이나 식어버린 모양이다. 전쟁이 끝났다고 물건 값은 많이 떨어지고, 저마다 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주선과 활동이 많다. 우리네 한교들도 귀국수속과 주선을 하고 있으나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크고 작은 일이 착착 진행되지 못하는 것이다. 내일이 국치기념일인데 금년에도 거르지 않고 각 구역으로 모인다고 한다. 제시는 요즘 독본 제3권을 읽느라고 분주하다. 가을에 학교에 입학시키려 했던 계획이 시국
의 급변으로 중지가 됐다. 부리전히 집에서 공부하다가 귀국 후 3학년에 입학하도록 해야겠다.

1945년 9월10일 월요일
음력으로는 8월5일. 이제는 가을이 문턱에 다가온 느낌이다. 그리도 무덥던 날씨가 아침 저녁으로 쌀쌀해졌다. 더구나 근일에는 가는 비가 오고가고 하더니 더욱 추워진다! 애들은 춥다고 겹저고리를 입고 다닌다. 어제 저녁 11시20분에 동암 차리석 선생이 관인의원 125호실에서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고향으로 가는 날을 목전에 두고 먼저 떠나신 분, 누구보다 먼저 고향땅에 가 계신건지. 추워지는 날씨에 마음까지 더욱 쓸쓸해진다.

1945년 9월20일
음력 8월15일. 추석날이다. 금년은 전과 달리 중국이 항전 승리한 해라고 하여 시내 곳곳이 대단히 흥청거린다. 우리도 이곳에서 다시 추석날을 맞이하지 아니하려는 생각에서 마지막이라는 맘으로 그전과는 달리 지내려 한다. 이제 전쟁이 끝을 맺은 것이다. 명절 분위기를 내고 싶어서 제시와 제니가 있는 만큼 월병도 두세 종류 사고, 유즈(귤의 한 종류)와 사탕도 넉넉히 사왔다. 그랬더니 아이들은 철없이 좋아라고 한다. 이제 자신들의 조국으로 돌아갈 아이들에게 중국생활이 어떻게 기억될까? 누구든 자신이 가진 경험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으로 어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이다. 전쟁에서 일본이 패한 지금, 그동안 쌓아왔던 독립을 위한 우리들의 노력도,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나날을 한가닥 희망과 신념으로 걸어왔던 시간도, 이제 조국을 우리 것으로 되찾아 와야 할 또다른 과제 앞에서 그 빛을 더욱 발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1945년 9월30일 일요일
며칠째 내리던 비가 오늘은 더욱이나 다량으로 아침부터 쏟아진다. 퍽 서느러워서 좋다. 웬일인지 채소와 식료품 값이 매일 올라가고 있다. 무 한근에 100원, 과자 한근에 1,600원을 한다. 그러나 일용잡화는 전보다 값이 많이 떨어져 반값 내지 그 이하로 떨어져 매매가 되고 있다. 남경 방면에는 중경에 비해 물가가 어찌나 싼지 놀랠 정도라고 편지가 왔다. 우리도 속히 남경 방면으로 가게 될 듯 싶기도 한데…

1945년 12월25일
크리스마스 날이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로 독립운동을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살았기 때문에 교회도 유지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공백상태로 있다가 한인교회가 성립된지 근 일 년 남짓이 되었다. 아버지는 한인교회 장로로, 어머니는 우리 한인교회 권사로 계셨다. 성탄 축하도 이번이 처음이고 마지막이라 중경, 토쿄, 남안 3구로 나누어 축하예배를보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식구가 다니는 중경교회의 크리스마스 축하식이 성대히 거행됐다. 우리 제시자매의 성탄 예물은 적지 않았다. 그만큼 기침을 콜록이는 두 애들의 기쁨도 적지 않았다.

1945년 12월31일
제2차 세계전쟁을 끝맺은 1945년은 오늘로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됐다. 유태경 선생 내외분과 옆방에 계신 임의택 선생, 그리고 우리, 이렇게 세 집 식구가 모여 식사를 하며 발표할 수 없는 감회에 각자 잠겨 있는 듯, 때로 엄숙한 표정도 보이곤 했다. 내일은 1946년 초하룻날!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려는가? 다사다난했던 지난날들, 사경을 헤매며 구사이생으로 살아남아 활동하던 나날들! 다시는 그러한 장면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세계 전쟁을 끝맺은 1945년이여. 안녕!

1946년 1월5일 토요일
음력으로 12월3일. 날씨는 맑다. 음력 초 이삼 일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한달 동안은 일기가 좋다고들 하는데, 이번 달엔 날씨가 좋아서 여행길에 곤란이나 없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우리 팀은 15일 전후해서 떠나게 되는 듯 싶다.
약을 수십 여 종을 써도 애들 기침은 낫지 않는다. 요즘엔 초약을 또 써보고 있는 중인데, 의사의 말로는 이 지방을 떠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전지요양이라니, 일주일 이내로 이곳을 떠나게 되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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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무조건 투항’을 전하고 있는 호외와 신문



마지막 중국여행… “그리던 조국으로”

1946년 1월16일 수요일
두달동안이나 주선한 결과 오늘에야 귀국의 길에 오르게 됐다. 고향으로 가는 길에 오르는 장도의 버스를 타게 된 것이다. 영원한 귀향의 길이다.
오전 10시30분에 우리가 탄 버스는 중경시가를 떠나게 됐다. 7년 동안이나 운무 중에서 살던 사천성의 생활도, 특히 5년여를 보냈던 중경생활도 오늘로 고별이다. 그야말로 시원섭섭하기 이를데 없다. 하여간 귀국길에 올랐으니 기쁘다기보다 감개무량이다.

자동차 앞머리에 꼽힌 태극기도 그것을 아는지 유쾌하게 휘날리고 있다. 오후 5시반에 우리가 5년 전 1년7개월이나 정착하고 살던 기강에 도착했다. 기강에서 중경으로 향하던 나흘 간의 뱃여행. 양자강 회전수에 휘말려 죽을 뻔했던 그 길고 힘들었던 길을 버스를 타고 그저 반나절 걸려 이르렀다. 우선 초대소에 들어가서 편안히 잘 쉬었으나 거리관계도 있고, 시간도 없어서 전에 묻어주
고 떠났던 선배들의 묘소를 찾지 못하는 것이 퍽 유감이다.

1946년 1월17일 목요일
아침 7시에 버스는 산곡길을 달리고 있다. 우리가 탄 차는 이행 중 제1비에 제1반 차이다. 버스 한 대에는 45명이 타고 있다.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1진, 2진 등으로 각기 날짜를 달리하여 신청을 받는다. 각자 중경에서의 생활이 정리되는 시기에 맞춰 떠나게 됐다. 김구 선생님을 비롯하여 가족이 없는 국무위원, 원로선생님들은 먼저 비행기로 출발하셨다. 그리고 이제 가족들이 있는 임정 식구들은 버스로 움직이게 됐다. 모두들 고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한결같아 우리 앞에 놓인 여행길이 한달음에 끝나기만을 빌 뿐이다. 오늘밤은 백마라는 역에 와서 지내게 됐다. 오늘의 노정은 산곡길이라 좀 험했다.

1946년 1월20일 일요일
오전 7시에 검강을 떠나 용담역에 도착했다. 오늘의 여정은 산길이 반이었고 그후부터는 버스가 평야로 달리기 시작했다. 흔들거리는 버스여행에 애들이 힘들 텐데도 잘 참아주는 것이 고맙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자는 말을 듣고는 자기들도 좋은지 아무 소리 없이 잘 따라준다. 앞으로는 산로의 험악한 길은 거의 없고 비교적 평탄한 노선으로 가게 된다고 한다. 평탄한 길! 이제 우리 앞에도 평탄한 길이 놓였다고 자신할 수 있을 때는 언제인가? 일본이
우리의 주권을 빼앗은 그날부터 조국을 되찾기 위한 조국으로부터의 탈출이 이어졌고 그 조국을 바로 곁에서 바라보면서도 들어갈 수 없었고, 한 치 앞 내일을 알 수 없었던 생활이었다. 험난한 삶이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한 가지 희망을 가지고 있기에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에 험난한 줄 몰랐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이었기에 마음 속에 다른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았기에 후회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기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목적지에 엉거주춤 오게 됐다. 아직 평화로운 조국의 모습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평탄한 여정이 펼쳐질 날이 오게 될 것인가. 오늘은 일요일, 고국을 향해 길을 떠난지 만 4일째 되는 날이다.

1946년 1월21일 월요일
오전 7시반에 용담을 떠난 차는 온종일 달리고 있다. 백리마다 풍속이 바뀐다는 거대한 땅덩이. 중국의 모습이 눈앞에서 휙휙 지나가고 있다.
언젠가 다시 와서 지금의 이 시간을 추억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쯤이면 아이들은 중국의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맨 처음 내가 중국땅에 온 것은 아버지와 함께였다. 지금의 제시 아버지인 양대벽(대벽은 당시의 호, 소벽이라고도 했고 중국 이름인 이춘강, 양묵 등 신변보호를 위해 여러 가지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과 서울에서 한번 만난 이후로 편지 왕래를 계속 해왔던 나는 아버지에게 마음 속의 신랑감을 선보이기 위해 중국땅을 밟게 됐다. 당시 광주에 있었던 제시 아버지는 우리가 우선 홍콩에 들어가자 다른 독립운동하는 동료들과 함께 숙소로 찾아왔었다. 아버지와 내가 그들과 몇 차례 만나는 것을 지켜본 홍콩의 일본경찰은 우리를 독립운동하는 패거리와 접선하는 불량선인(불량조선인)으로 분류하여당장 중국에서 나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교편을 잡으셨던 아버지는 일어에 유창하고, 왜경들에게 당당했다.

우리는 여행을 왔으므로 끝까지 구경을 하고 돌아가겠다며 버텨 결국 상해와 만주를 거쳐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의 보호(?) 아래 무사히 중국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혔던 천는 다시 중국으로 결혼을 하기 위해서 유학을 빙자해 들어왔고 그후 십년 세월을 중국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동안의 중국과의 인연을 정리하고 고국에서의 새 생활을 시작하려고 한다.

1946년 2월17일 일요일
아침 6시에 행선이 시작됐다. 잔잔한 양자강 물결! 또 좌우 언덕의 절승한 경치는 볼만한 것이 많았다. 그중에서 특히 독두산이라는 아름다운 경치, 미묘한 건축물을 흠모하면서 구경했다. 언제 다시 오게 될까? 이 중국의 광활하고 다양한 얼굴을 맞닥뜨리니 이 중국땅에 이전과 다른 잔잔한 애정이 느껴진다. 지난 시간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친근감이요, 애잔한 향수 같은 느낌이다.

1946년 2월19일 화요일
오후 2시에 경호급행차 중에 보자 두 칸을 준비해주어서 평안히 밤 11시에 상해상점에 도착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탄생하고 그 뿌리를 내렸던 도시.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임시정부의 방랑의 세월 속에서 광주로 가있던 우리 부부가 다시 임정 본부로 합류한 것은 임시 정부가 중일전쟁으로 인해 항주, 진강에 이어 소주, 남경, 한구를 거쳐 장사로 피난했을 때였다. 그리고 오늘 다시 상해에 돌아온 것이다.

1946년 4월24일
2개월하고 4일의 상애 생활은 오늘로서 끝나는 모양이다. 비상한 감회가 태산 같고 하해 같아서 설필로 다 발표할 수 없다. 아침 8시가 지나서야 트럭이 와서 세 시간 동안이나 비를 맞으며 기다렸던 행리를 싣고 ‘강만 전시정부’로 속력을 내어 달려갔다. 강만 전시정부에 도착하자 여기서는 검사를 받아야
된다고 해서 비 맞으며 검사받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l 검사는 하는 척만 하는 것이다.

1946년 4월25일
이렇게도 고국땅 밟기가 힘이 드는 모양이다. 어제 아침 5시부터 온종일 비를 맞으며 부모를 따라다니던 어린애들이 애처롭고 가엽기 그지없다. 고생스런 시절을 지나고 있는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된 다음에 중국생활의 의미를 어떻게 지니게 될까? 이 아이들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을 갖게 되길 바란다. 그것이 결코 달콤한 열매를 맺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 자신에게 정직하고 충실한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길 바란다.

1946년 4월26일
아침에서야 배가 항해하기 시작했다. 우리 조국, 조선 땅으로 가는 배다. 우리 몸이 실린 곳은 큰 배인 LST로 Clnatna Clay였다. 제2회 아래층 층계 뒷자리에 우리 네 식구가 몸을 의지하게 됐다. 일기는 맑고 바다는 잔잔하여 온종일 편안히 잘 왔다. 27일에도 일기는 계속 맑고 풍랑이 없어서는 배는 잘 항해하고 있었다. 하늘도 우리의 귀환을 축복해 주는 것 같다.

1946년 4월29일
별 사고 없이 항해는 계속됐다. 28일 이른 아침에 멀리 제주도가 보였다. 제주도의 풍경과 한라산을 바라보니 감개무량했다. 이제 고국의 바다를 향하고 있구나 생각하니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제할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섬들을 지나 29일 부산 앞바다에 도착되었다. 삼천삼백여 명이나 되는 전체 선객들은 모두 고국산천을 바라보며 반가워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중국 태생인 우리 애들은 별로 기뻐하는 표정이 없었으나 엄마아빠가 내 나라 땅에 왔다니 좋아하고 있다. 이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 모든 것이 제자지로 돌아갈 때까지 얼마간 시간은 걸릴 것이다. 서구문명에 깨어 있었던 중국에 비해 어쩌면 불편한 점이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우리의 조국이다. 일본이 물러간 우리의 땅이다. 이제 그 땅을 지키는 일이 남아 있다. 낯선 땅, 어디서고 조국을 잊지 않았던 우리가 과거의 조국을 찾기 위한 투쟁이 아닌, 새로운 조국을 만들기 위해 이해야 할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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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에 돌아가기 직전 친구들과 함께(1946년 상하이).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제시 아버지 양우조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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