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모 시

2009-05-12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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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창호 공인세무사, VA

‘어즈버,
태평세월
52회
아시는지요!

짐짓 잊으시고
굶기도
하시어라!

천지성상(天地星霜)
다 잊어도
소자 어찌 오늘을!


오호(嗚呼)
노숙단신(露宿單身)
하일(何日) 공명(功名)
모심 족(母心 足)


이 글은 필자가 육군중위로 야간에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재학시절에 쓴 첫 번째 시다. 그때 나는 국방부 국립묘지 관리소장 부관 직에 복무하고 있었는데, 1965년 10월 31일(음력 10월 8일) 일요일, 이날도 보통날과 같이 나는 북가좌동에서 아침 일찍 버스를 두서너 번 갈아타고 거의 1시간 넘어 안암동 고려대학교 대학원 도서관에 도착하여 다른 학우들과 같이 학기말 시험준비에 분주하던 날이다. 그때 도서관엔 사법고시 수험생들이 거의 밤을 새워 가며 공부를 하고 있는 초췌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는데, 나도 그들 틈에 끼어 함께 공부를 하고 있었다. 주경야독의 패기만만했던 청년장교 나였지만, 오늘이 어머님 생신일임을 알게 되니 마음속이 천근만근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잠시 머리를 숙여 어머님을 위한 기도를 드린 후 백지 한 장 위에 ‘사모 시(思母 詩)’ 몇 자를 적어 보았다.
2009년인 지금으로부터 약 60여 년 전 소년시절이었을 때의 일인데, 그날따라 나는 일찍 집에 들어왔는데 어머님께서는 부엌에서 큰 가마솥에 김장 무를 가득 채우고 열심히 씻고 계셨다.
밤늦게도 다 못 끝내실 것 같아서 나도 한쪽 가에 쪼그리고 앉아 그 일을 도와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이 바로 음력으로 10월 초8일, 어머님 생신날인 것을 알게 되었다. 생일잔치는 고사하고 저녁도 굶고 김장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자신을 발견하시고도 전혀 아쉬운 생각을 안 하시고 일에만 골몰하고 계셨다. 이런 일이 다반사였다.
아무리 학기말 시험때문에 도서관에서 밤 늦게까지 책과 씨름하는 그때였지만, 문득 그날이 주일이자 어머님의 52회 생신일인 것을 깨닫게 되자 나는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어머님의 이같이 지나간 일들을 회억하면서 이 시를 몇 자 속히 쓰고 난 후 그때 쓴 종이를 45년이 지난 오늘에도 일기장에 정성껏 첨부해놓고 이역만리 이 미국 땅에까지 가지고 와 잘 보관하고 있는 중이다.
나의 어머님은 가난한 집에서 또 다른 보다 더 가난한 집으로 일찍 시집오시어 늘 고생만 하시다 이 불효자의 ‘하일(何日) 공명(功名) 모심 족(母心 足)’ 싯귀가 성취되는 날을 못 보신 채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인, 1993년 1월31일 79세를 일기로, 2003년에 93세를 장수하시고 소천하신 부친보다 10년 먼저 타계하셨다.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기기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 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 뿐인가 하노라”?길재 선생의 싯귀가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오늘 70세 노경을 보내는 소자 박창호의 숨은 간장을 녹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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