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화폭속의 어느 봄날

2009-05-07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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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개인듯 하나 둘 가로등불
달무리로 떠올랐습니다
뉘엿뉘엿 스러지는 노을빛
불빛 안개젖어
물든 가로수의 폭넓은 초저녁 봄거리를
웅성거리는 발길들

꽃파는 소녀가
성장한 보닛(bonnet)의 아리따운 여인에게
한아름 꽃다발을 안겨주는 저녁 어스름
아련한 탁자 불빛이
꽃송이를 부드럽게 채색하는 시간
이승에서의 짤막한 휴식 공간

잎새 듬성한 나무그늘 둘러놓인 원탁밑으로
불빛 쫓는 비둘기 몇마리
상큼한 매무새의 연인과
멋스러운 햇(hat)의 남성들이 사색에 잠긴 모습
스쳐가는 인연의 순간들을 조용히 가늠합니다


넓게 열린 광장으론 이제 막 떠나는
쌍두마차의 발길하나
강보 보듬은 어린아이와
젊음이 촉촉한 거리 불빛너머로
말굽소리 울려올듯
마차의 불빛 하나

멀리 가까이 솟아오른 도심의 크고 작은 건물들
요모조모 아로새긴 아트
거장의 손자욱 짙게 배어 샹델리에 불빛 환하게
새어나는 노을구름에 창은 돌아와서
열리는 아침의 신세계를
밝게 비추고 있질 않습니까?

문득 턱시도에 긴 단장을 낀 중년의 신사가
19세기적 귀부인의 찰랑이는 옷깃을 따라
스피츠 강아지 쫄랑거립니다

황혼 짙은 노을빛이 어둠으로 물드는 대지
이른 봄날의 긴 적막이 휘장을 내리듯
우리들의 젊음과 추억이
밤의 장막에 소리없이 저무는 봄밤
한폭의 꿈을 접습니다


이택제 /워싱턴 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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