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병마 내 자신 돌아보게 해
서로 사랑하고 축복받는 새해 기원
애들이 그렇게 원했지만 없었던 것이 오히려 애들이 떠나고 나니까 생겨 버린 것이 있다. 강아지가 생긴 것이다.
전에도 한 번 강아지가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우리 큰딸을 계속 무는 바람에 일주일도 못 돼서 다른 곳에 보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애들도 없고 또 진돗개라고 해서 그만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말았다. 요즘 건강에 유의하느라 산책도 많이 하는데 같이 데리고 다니면 좋을 것 같았고 어릴 때 집에서 키운 진돗개가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깜빡 잊었던 것이 우리에게는 이미 고양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드디어 강아지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모두 귀엽다고 난리들이었지만 우리 고양이는 그렇게 조그맣고 귀여운 강아지를 보고 첫째로 하는 말이, “캬!”였다. 아니 이렇게 예쁜 강아지를 보고 “캬!”라니! 온 털을 다 세우고 무슨 괴물이라도 본 것마냥 난리다. 그리고 이것저것 챙기느라 잠깐 방심하는 동안에 임시 침대로 설정한 야채상자 속에 누워 있는 것을 틈타 앞 발톱이 공중을 갈랐다. “앗!”했지만 하나님이 보호하셨는지 강아지가 마침 돌아눕느라 할퀴지는 않았다. 영어에는 비가 심하게 올 때에 “개와 고양이 같이 심하게 온다.”(It is raining like cats and dogs)라는 표현이 있는데 개와 고양이의 관계를 실감나게 잘 말해준다. 개는 꼬리를 흔드는 것이 우호적 제스처지만 고양이는 “한번 해볼래!”라는 의미인 것도 중요한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밖에도 많이 있었다. 우선 아직 개집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두 주째 비가 내린 것이다. 역시 진돗개는 진돗개라 대소변을 어찌 잘 챙기는지 임시로는 안에서 키울 수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그날 필자가 감옥에서 상담을 하다가 심장마비를 당한 것이다.
순간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이렇게 간단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직 데려가실 날이 아니었는지 상담을 받던 재소자와 간수들이 곧바로 조치를 취해 주어서 무사히 수술을 받았지만 말이다. 필자에게는 걱정과 근심이 없는 천국이 더 좋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하나님은 집사람을 더 생각해 주셨나보다. 그리고 감옥사역도 그렇고.
그래서 강아지가 오자마자 고양이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 이외에도 문제는 많았다. 남편이 병원에 실려 갔고, 학교와 교회는 연말이라 행사가 꽉 차있었다. 까딱 잘못하면 집사람까지 입원하게 될 판이었다. 거기다가 아빠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 있는 큰 딸이 누나로서의 권력을 발휘해서 할 일이 많다고 보스턴에 남아 있는 남동생에게 비행기표를 보내서 집으로 달려 오게 한 것이다.
어짜피 정월 중순에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를 한국에서 할 예정이니까 여러 가지 마무리지을 것도 있고 해서 LA 집에는 그 때나 들르겠다고 하며 안 오고 있던 것을 아빠가 일을 당했으니 옆에 가서 도와 드리라고, 또 엄마아빠에 대한 큰 크리스마스 선물로 호출한 것이다. 물론 한 명이라도 더 함께 명절을 지낼 수 있다는 것처럼 큰 선물은 없지만 문제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들이 닥쳤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와 고양이의 사이 같이 심상치 않은 관계가 일본에서는 개와 원숭이라고 하고 우리 집에서는 둘째아들과 셋째아들의 사이이기 때문이다. 일 년밖에 터울이 안 졌는데 같은 형제이면서도 어떻게 그렇게도 성격이 다른지, 둘은 만나면 하나부터 열까지가 논쟁의 대상이 되고 만다. 보통 누나가 있으면 누나가 중재를 해 주지만 누나가 없으니 문제가 심각했다. 셋째는 원래 아빠 같이 요리를 좋아하지만 둘째는 전혀 부엌은 근처에도 안 갔었다. 그러다가 다니는 미술대학은 식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고생을 하면서 배워서 이제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번 참에 그동안 갈고 닦은 솜씨를 발휘하고 있는데 그 때 들이 닥쳐서 중동사태를 방불케 하는 소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식을 키우면서 한 가지 배운 것은 이럴 때 절대로 아빠가 그 틈에 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공평타당한 말을 해도 자칫 편을 든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다툼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인데도 싸움이 될 수 있을 때는 아무리 아빠의 말이라도 잘못 연계되면 역시 다툼의 소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 큰 아이들이 열을 올리면서 다투는데 아빠의 권위를 제쳐놓고 그대로 잠잠히 있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서 중간에 여러 번 위기가 있었는데 여기에 뜻밖에 도움이 된 것이 우리 강아지였다.
그 쪼끄마한 놈이 얼마나 귀여운 짓을 많이 하는지 강아지를 보고 있자면 언제 싸웠느냐는 듯 배꼽을 잡고 웃게 만든다. 또 우리 고양이를 보러 뒷마당에 오던 큰 수고양이가 그래도 진돗개라고 이제는 얼씬도 못한다. 마찬가지로 동네에 있는 아들 친구가 하루는 사냥개인 비글을 데리고 놀러 왔다. 혹 강아지를 물지 않을까 잔뜩 긴장을 하면서. 그러나 실제로 덩치는 10배는 더 큰데도 쫓겨 다녔던 것은 오히려 비글 쪽이었다. 깡충깡충 뛰면서 비글의 앞길을 막다가 또 곧 뒤쪽으로 가서 뒷다리를 장난스럽게 쪼니까 말이다. 하는 짓 하나하나가 모두 재롱이고 또 얼마나 똑똑하고 말기를 잘 알아듣는지 모른다. 그리고 강아지 특유의 그 순박하고 맑은 눈빛은 우리의 모든 적의를 녹여버리고 이런 와중에서도 우리에게 큰 웃음을 선사해 주고 말았던 것이다.
금번에 필자는 새해를 못 맞을 뻔 했었다. 그러나 이 경험을 통해서 느낀 것은 우리가 애착하는 것 중 오히려 헛된 것이 많고 오히려 값진 것은 우리가 전혀 값진 줄 모르고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국내외로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서로 사랑하고 돌보는 우리 모두가 되어서 새해야 말로 오히려 축복의 한해가 되었으면 하고 생각해 본다.
황석근 목사 <마라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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