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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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와 단풍나무

2008-04-1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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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마당에서 한참 일하고 나서 집안으로 들어왔다. 온몸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허리는 끊어지듯 아팠다. 진흙이 잔뜩 묻은 신발을 벗고 나서 바로 뒷마당 쪽으로 난 창으로 갔다. 아직 한참이나 어린 9피트짜리 단풍나무가 오똑 서있었다. 아, 내가 금방 심은 나무였다.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다음엔 앞마당 쪽으로 난 창으로 갔다. 거기에도 어린 9피트짜리 은행나무가 오똑 서있었다. 아, 이것도 내가 금방 심은 것이었다. 얼마나 늠름한지.

구덩이를 파고 나서 나무를 심으려 할 때, 뿌리 쪽의 큰 흙덩어리가 너무 무거워 아내의 힘을 빌었어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침 귀가하던 옆집 사람이 나무를 부둥켜 않고 끙끙 매는 우리를 보고 그의 든든한 근육을 빌려주어 나무가 구덩이에 잘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를 본 그가 미소 지으며 한 마디했다.
“완벽한데. 동쪽과 서쪽. 은행나무와 단풍나무. 자네는 이제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두 나무 사이의 집에 살게 되었네.”
아내가 내게 속삭였다.
“칼럼 감이네!”
정말 그랬다. ‘한국과 미국’이란 이 칼럼의 주제가 동양과 서양에 대한 것이 아닌가.

그렇기는 하나 사실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각각 동양과 서양을 대표한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나의 한국 시절 사진첩에는 거의 모든 사진이 가을 색을 담고 있는데, 그 중 단풍나무가 가장 많다. 한국에서 사는 동안 울긋불긋한 색을 보러 설악산으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도 단풍나무가 꽤 많았다.

하지만 단풍나무의 많은 종류가 아시아산이라는 사실을 들으면 깜짝 놀랄 미국인이 많다. 미시간에 살 던 어릴 적, 우리 서양 가족도 차를 타고 숲이 많은 북쪽으로 ‘가을 색 피크닉 여행’을 갔었는데 그곳에도 단풍나무가 아주 많았던 것이다.

은행나무도 그렇다. 영어로 ‘깅꼬’라 부르는데, 미국인들 귀에도 일본어임이 확실해서 은행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은행나무는 동양 산이라 여긴다. 그렇지만 미국 중서부 한 가운데인 우리 옆 동네에도 은행나무 대여섯 그루가 큰 길 사거리 한 중간에 수십 년 동안 우뚝 버티고 서서 쑥쑥 자라고 있다.

모두 암나무로 은행을 생산해서, 가을이 되면 산보하다가 독한 은행 냄새를 불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은행을 줍는 사람도 한 두 번 본 적이 있다. (사실 우리도 은행을 먹으려고 암나무를 심고 싶었지만, 나무가게들은 은행 냄새 때문에 숫나무밖에 팔지 않았다.) 은행나무는 지구상 가장 오랫동안 살고 있는 나무의 하나라 한다. 그 단단하고 생명력이 강한 동양나무가 미국의 한 작은 동네의 분위기를 살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막 봄이 시작되었다. 잎은커녕 새순이 났을까 말까한 창밖의 어린 나무를 보며 용문사에서 보았던 거대한 은행나무를 생각해본다. 2000년과 2007년 두 차례 보았는데, 절 보다 훨씬 더 숨 막히게 감동적이었다.

그 나무의 아름다움은 가을 색뿐만이 아니다. 나무를 대하는 우리에게 묻어오는 그 오랜 세월의 깊이가 주는 무드다. 우리 중엔 어릴 적에 금붕어, 새, 고양이, 개와 같은 애완동물을 기른 적이 있다. 우리 손에 자라던 그 동물들은 대개 우리의 눈앞에서 생명을 다했다. 우리에게 죽음을 가르쳤다. 하지만 나무 심는 것은 정 반대다. 나무는 우리에게 생명의 영원함을 가르친다.


나무는 우리보다 큰 어떤 것임이 확실하다. ‘우리 나무’라는 말은 ‘우리 개’ 라는 말과 느낌이 아주 다르다. 사람이 땅의 법적 주인일 수는 있어도, 그 땅에서 자라는 나무는 그 주인의 구속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무를 놓고 동양 것이다, 서양 것이다 할 수는 있는 걸까? 캘리포니아의 레드우드 나무는 미국인과 미국문화의 중심 나무라 할 수 있겠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신라시대에 심어졌다고 한다. 몇백년 동안 수없이 많은 한국 이야기 속에 등장했다. 한국인들이 울 때 같이 울고, 웃을 때 같이 웃었으니 한국의 나무라 해야 할까?

아니, 그 나무는 그저 무관심하지 않았을까? 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서 대한민국이 되는 한국 역사의 퍼레이드를, 또 다른 바람이 가지를 스쳐 지나나 보다 하면서 아무 관심 없이 내려다보았던 건 아닐까?

인간은 신이 자신에게 관심 가지며 돌봐주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무는, 인간보다는 크고 신보다 작은 나무는, 우리에게 전혀 무관심한 그 아름다움 때문에 우리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한국과 미국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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