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피니언] 추억을 불러준 테입

2008-03-04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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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설자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게으름을 부리는 것도 한정이 있었는지 오늘은 차분히 앉아서 리빙룸 한쪽 벽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는 옥돌장 서랍 속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웬만하면 과감하게 정리해야겠다고 마음에 다짐을 하면서 우선 수북이 꺼내놓은 비디오 테입과 카세트 테입부터 붙여져 있는 제목 따라 골라낸다. 유난히 ‘1994년 4월20일 형제 모임’이란 제목을 내 필적으로 쓴 카세트 테입이 눈에 쏙 들어온다. 잘 쓰지 않던 카세트 플레어를 꺼내 먼지를 털어내고 테입을 깊이 밀어 넣었다. 친정 동생들과 온가족이 함께 한 가족애가 넘쳐나는 남편의 생일날이었다. 마침 이민을 앞두고 미국견학 겸 방문 온 여동생, 막내 남동생과 수년 만에 가져보는 행복한 순간들이 실려 있다.
누구나 일정부분 삶에서 옛 추억을 담고 살아간다. 이산가족이 된 우리형제는 지금은 한국에 둘, 이곳에 네 형제가 살고 있지만 이민 첫 개척자로의 애환 속에 갈등하며 때로는 어려움을 이기지 못해 마음고생하며 외로워 울던 그 시절의 애틋한 옛 추억과 함께 흥겨운 리듬을 타고 ‘두만강 푸른 물에…’ ‘황성옛터…’ ‘옛 시인의 노래’ ‘무인도’ ‘ 개똥벌레’ 등등 쉬지 않고 가라오케 반주에 맞춰 이어지는 노래와 웃음소리와 정겨운 대화가 줄줄이 흐르는 속에 아득한 옛 추억 속으로 데려다 준다. 어린 시절 친정아버지께서 약주를 드시면 기분 좋아 부르시던 옛날가요를 들으며 성장기를 보낸 덕택인가 우리형제들의 노래실력은 제법 들을만하고 나무랄 데 없는 목소리들을 가졌다.
유난히 오늘은 30여 년 전 고국나들이에서의 추억도 잊을 수 없다. 투병 중이셨던 어머니를 위로하며 동생과 교회에서 듀엣으로 특송(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한 것이 있으랴)를 부른 적이 있었다. 딸들의 찬양을 들으시며 교회 앞좌석에 힘들게 앉아 미소지우시던 어머니의 초췌한 모습이 떠오르니 핑 도는 눈물을 주체하기 힘들다. 형제들이란 어린 시절엔 한 이불에서 함께 자며 어울려 놀던 아름다운 과거가 있기 마련이고 현재와 미래를 소유하며 살아가야하는 필연적인 혈연의 관계가 아닌가.
그러나 형제간에도 사랑을 나눠주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민의 삶이 지치고 힘들었어도 열심히 일하면서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서로 서로 격려하며 사랑함과 건강함속에서 오늘의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형제들이 있어 한없이 고맙고 흐뭇한 마음이다.
부지런히 살아가는 즐거움처럼 여유 있는 인생은 없다고 생각한다. 먼 옛일들을 떠올리면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꽃으로 피어오르듯이 삶을 되돌아보는 이력의 세계는 언제나 잡다한 아름다움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주신 은혜요 나에게는 끝없는 기쁨이다. 한없는 감사가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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