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로 기억한다. 두 달 동안 딸의 산후조리를 마치고 그 동안 비어있던 썰렁한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벨 소리가 울려 뛰어가 들어보니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여고 동창생이었다.
우선 여행 가방부터 풀어 정리해 놓고 여기저기 대청소를 마친 후 점심은 내일 밖에서 하고 우리 집이 가까우니 집에서 저녁을 내 손으로 맛있게 해주고 싶어 준비를 해 놓았다. 밥은 현미 잡곡밥에 조개 시금치국, 생강 대추차에 과일도.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은 오지 않고 50년 전 필름을 거꾸로 돌려 샅샅이 풀어보기만 했다.
내가 일찍 한국을 떠나 남미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생활했기에 여고 동창들과는 거의 소식이 두절되어 있었다. 고달프고 바쁜 이민생활이 편지 쓰며 고향타령 할 틈을 주지 않았다.
다음날 드디어 날은 밝았고 47년 만에 재회하는 날이다. 보통 때와 달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좀 신경을 쓰지만 옛날 모습은 오간데 없을 것이고….
그런데 세월이 너무 얄미울 정도로 그 친구를 바꾸어 놓았다. 늘씬한 키에 피부도 곱고 동글동글한 예쁜 얼굴에 우리 교복은 밴드가 있어 날씬한 몸매를 한껏 자랑하기에 좋았는데 그만 확 달라져 버린 이 친구, 백발이 왠지 서글퍼 보였고 힘이 없어 보였다. 목이며 얼굴에 푹푹 패인 주름, 그 날씬했던 허리는 사라져버렸고 부부 모두 대수술 후유증에 투병한 흔적이 온몸에 배어 있었다.
점심 식사 후 그 친구도 나와 똑같이 저녁 준비를 해놓고 자기 집으로 가자고 끌어서, 나도 또한 그의 집이 궁금하기도 하고, 할 수 없이 끌려갔다. 집안에 들어서니 박물관을 연상하게 했다. 많은 시간 미술에 전념했던 흔적이 온 집안에 가득하다. 베란다에 앉아 아름다운 대자연을 만끽하면서 멀리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도 간간이 보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미국에 온지 그리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영어 배우러 다니느라 바빴고, 새벽기도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이었고, 맛있는 갓김치, 깍두기, 호도, 멸치 볶음 등 맛있게 만들어주던 너. 지금은 어디 있니? 하늘나라에서 내려다 보고 있니? 이제는 영영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들. 또 앞으로도 다시는 만들 수 없는 시간들. 남편 간호하느라 자신의 건강은 전혀 돌아보지 않은 네가 너무 원망스럽다. 조용히 손자들과 웃고 즐기는 나를 학창 시절로 끌어들여 온통 흔들어 바람만 잔뜩 넣어놓고 떠나간 너, 정말 미워 죽겠다. 남편 재수술은 잘 됐다고 들었어. 네가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준 영자의 말이 거짓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고, 장례식 마치고 돌아 왔다는 순자의 전화도 거짓이었으면… 너 떠나면서 우리 만난 1주년 기념일 특별 행사를 열자고 했지! 그래서 나는 여러 가지 계획 세워놓고 너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민자야 이제는 꿈에서라도 자주 만나자. 그리고 이제는 집안걱정, 남편걱정 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주님 곁에서 편히 쉬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