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동창 송년회

2007-12-2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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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신문은 온통 동창회나 친목단체 또는 직장의 연말모임 사진으로 요란하다. 나도 여고 동창회에 나가 하루 저녁 오늘의 나를 잊고 여고시절의 나로 돌아가 광란(?)의 한 때를 보냈다. 40대에서 70대까지의 동문이 한 자리에 어울렸으니 나이층에 따라 노는 태가 다르고 말과 행동도 다르고 그래서 갖가지 해프닝도 벌어진다. 장기자랑 시간에는 수십여 성상을 쌓아온 나름대로의 장기를 ‘망가져도 좋다’는 전제 아래 풀어 놓으니 요절 복통, 박장대소에 경우에 따라서는 감동의 눈물도 뒤섞인다.
나도 ‘막가 춤’ 판에 끼기도 했고 푸짐한 선물도 챙겼다. 모처럼 긴장을 풀고 지낸 하루 저녁은 꿈속에까지 들어와 잠을 흔들어 놓았다.
아침에 깨어보니 전날 저녁의 일탈이 쑥스럽게 느껴진다. 허전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아침을 준비하려고 부엌에 들어가니 전화기에서 메시지 램프가 깜박거린다.
“나, 너무 심심해서 전화해 봤어, 너 어디 나갔구나”
벤추라에 사는 친구의 음성이다. 아차, 내가 이 친구를 잊고 있었구나! 미안함으로 머리칼이 쭈뼛 올라가는 느낌이다.
이 친구는 당뇨 합병증으로 눈이 잘 보이지 않고 또 멀리 떨어져 있어 친구들과 만날 기회가 거의 없는 처지라 집에 앉아 친구들과 전화로 만나는 걸 유일한 낙으로 삼고 있다. 그런 친구를 요며칠 깜박 잊고 지냈다.
그리고 내가 신나게 노는 사이 그녀는 어둠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죄의식마저 느꼈으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한동안 망설이다가 뒤늦게 전화를 걸어 송년파티 얘기는 쏙 빼버리고 바쁜 일로 전화도 못했다고 변명을 하고 말았다.
“친구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우리는 한해를 보내며 별로 만족할 만한 성취도 없고 아쉬움도 많아서인지 떠들썩한 송년회를 열고 한바탕 굿으로 마무리를 한다. 그러면서 일종의 보상심리랄까 하는 게 작용해서 그 행사 가운데 자녀들에 대한 장학금도 주고 불우시설이나 자선단체에 성금을 전달하는 순서를 넣기도 한다. 그건 나무랄 일도 아니고 권장할 일이다.
그런데 나는 동창 송년회에 거창한 명분을 거는 것도 좋지만 어디까지나 동창들의 모임이니까 잘된 동창, 잘 못된 동창 또는 친근한 동창, 소외된 동창이 함께 어울리는 그런 동창모임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이번에 갖게 되었다.
이번 우리 동창 모임에는 병든 친구를 대신하여 그녀의 남편과 딸이 참석하여 이색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비록 병상에 누워 참석은 못했지만 남편과 딸이 그녀의 근황을 알려주고 또 온 참석자들이 쾌유를 빌면서 위로하여 주었다.
요 며칠의 이런 일들이 오버랩 면서 연말을 맞는 내 마음에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 “내가 남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내가 남을 소외시키지 않고 살아온 삶이 가장 값진 삶이며 그것을 나누는 일이 가장 보람된 일”이라는 것을.

배광자
글렌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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