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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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과 책

2007-10-2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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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왔다. 대기가 선선해지고 햇빛이 맑아지면 다시없이 계절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되고 자연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된다. 가을은 예로부터 ‘등화가친의 계절’이라 하여 정신을 책으로 살찌게 하는 계절이라 여겨져왔다.
아는 분이 살던 집을 여름내내 리모델링을 한 후 오픈 하우스를 한다고 초대해 주었다. 가을은 찾아가는 계절, 찾아가 두 손을 맞잡고 지그시 그 눈을 들여다보는 사랑의 계절이라고 하지 않는가. 초대 받은날 방문의 선물로 ‘난’ 화분을 사들고 그 집을 찾았다.
주인은 반갑게 맞아 주었고 새로 단장된 집안 구석구석을 보여 주었다. 여성잡지에 소개되는 인테리어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멋있었다. 휘말려 올라간 구름커튼이며 장식용처럼 보이는 화려한 식탁, 웅장한 가죽 소파와 근엄한 거실 가구들, 최신형 고급 오디오 등등. 주인의 재력을 가늠할 수 있는 고급살림들이 유감없이 집안에 가득 차 있었다.
집안을 안내 하는 주인은 행복감으로 얼굴에 빛이 났다. 그런데 나는 웬지 낯설음과 어떤 의문이 들었다. 집안 어디를 둘러봐도 윤이 나는 가전제품과 가구들 뿐, 배달된 신문이나 잡지, 자녀들을 위한 양서, 가을에 읽어야 하는 책들은 도무지 눈에 띄지 않았다. 물질만 크게 보이는 이 집은 아예 책과 인연을 끊고 지내는 사람들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날 모인 사람들의 화두는 첨단과학이 만들어 내는 물질문명에 대한 정보교환, 돈 버는 이야기, 자녀들의 명문대 진학을 위한 교육 얘기, 누구는 어떻고 하는 식의 남의 생활에 관심 둔 이야기, 인기 드라마 얘기로 한참 떠들석한 분위기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모래 틈으로 물이 빠져나가 듯 그들의 대화에도 힘이 빠지며 저마다 자신들의 삶이 재미없고 고독하다고 했다.
가을이 오니 더 외롭고 고독하다는 그들의 고백은 얼어 있는 찬 손의 동지들 같았다. 어느 누구도 정신적인 풍요로움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았고, 현실적인 얘기로만 일관 했기에 같은 표정을 지닌 그들은 서로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 채 헤어졌다.
고독이란 사람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외로움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 혼자 사는 사람만이 외로운 것은 아니다. 남 보기에 부러운 복을 다 갖춘 사람들, 또 권력과 금력, 명예를 가진 사람들도 근원적인 인간의 고독감은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가을에는 그리움과 외로움이 가슴깊이 서려오는 것이 우리의 정서이다. 그러나 가을의 고독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으니 그것은 책을 펴는 일이다. 독서함으로 고독과 친해질 때 고독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게 된다.
책을 읽는 것은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이며 뛰어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풍요로움과 귀함을 알게 되면서 탐욕과 아집,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영국의 시인 밀턴은 “양서는 정신의 수혈” 이라고 했다. 고독하고 삭막하고 텅빈 머리에 생각하는 능력, 사람답게 사는 능력 , 문화를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길러 주는 고귀한 피를 머리 속에 수혈해 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삶의 경험을 통해서 인생을 배운다 해도, 독서를 통한 경험 분량의 확대를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찌기 소크라테스도 “남의 책을 많이 읽으라”고 했다. 남이 고생한 것을 가지고 쉽게 자기를 개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름내내 외부로 외부로 떠들석하게 떠났던 마음이 자기에게로 고요히 돌아오는 계절 가을이다. 밤도 길어진다. 정신적인 충족감을 위해, 정신을 살찌우는 양식으로서 좋은 책을 찾아 읽는다면 외로움과 고독은 밀려나고 행복지수는 높이 올라가는 이 가을을 보내게 될 것이다.

김영중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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