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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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졸업장

2007-10-1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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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에서 오랜만에 중고교 동창 네댓 명과 만나 저녁을 먹으며 반갑게 웃고 떠들게 되었었는데 장시간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가운데 제일 인기 토픽은 남편들 이야기, 정확히 얘기하자면 흉보기였다.
집에 들어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하는 남편, 취미가 달라 재미없는 남편 등등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한국 남성들에 대한 불평들을 얘기하다 한 친구가 제안을 했다.
결혼에도 졸업이 있으면 어떠냐는 것이다. 다들 박수를 치며 그거 그럴 듯하다고 토의를 거친 끝에 내린 결론은 한 사람의 배우자와 만나 10년을 살고나면 서로 웃으며 악수하고 졸업장을 주고받고 헤어진다는 것이다.
비한국인 남편을 가진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어머님 세대로부터 듣던 이야기들이 아직도 상당 부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실상에 좀 놀란 것이 사실이다. 나의 남편은 좀 독특한 서양인이라 내가 단 한 번도 요구하거나 기대한 것이 아닌데도 모든 살림을 스스로 도맡아 한다. 처음에는 말리기도 하다가 그것이 나를 몹시 편하게 해준다는 평범한 진실을 몸으로 느끼며 그에 아주 쉽게 익숙해져 갔다.
그런 그가 어느 날인가 내가 컴퓨터에 앉아 열심히 일을 하는 옆에 와서 저녁에 뭘 먹겠느냐 물었다. 아무거나 라는 나의 대답에 도움이 안 된다고 중얼거리며 부엌 쪽으로 가서는 냉장고를 열고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쟁반에 뭔가 가득 담아 와 침대 위에 좌르륵 쏟아놓는다.
꽁꽁 얼어붙은 스테이크, 치킨, 생선들이 마구 침대 위에 뒹굴고 있는 것을 보며 나는 깔깔 웃지 않을 수 없었는데, 자신도 웃음을 억누르며, “마담, 무엇을 요리해 드릴까요?” 한다.
나는 그 순간 초미의 관심사는 저녁거리를 고르는데 있다는 듯이 온 정성을 다하여 하나하나 살피는 척 하다가 얼른 스테이크 한 조각을 골라 이걸 요리해 달라 말해주고는 컴퓨터 앞으로 돌아갔다.
그는 기꺼이 요리를 하긴 하겠지만 메뉴를 정하고 음식을 만들어 함께 나누는 과정에 내가 적극 동참할 것을 무언중에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며,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남이 보기에는 멀쩡한 듯한 남편들과의 결혼생활에서 졸업을 하고 싶어 했던 동창들이 생각났다. 한국의 주부들은 자신의 직업을 가졌든 말든 모든 살림을 도맡아 하는데 그것이 부부 공동체 안에서 그냥 당연시 된다.
하면 당연하고 안하면 원망의 대상이 되는 일을 신나서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스로 주부의 역할을 떠맡은 나의 남편도 그것이 우리 사이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어떤 분명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면 그것을 중지해 버릴 것으로 생각된다.
나의 동창들의 또 다른 불만이었던 남편과 취미가 같지 않다는 점은 따지고 보면 꼭 취향이 같아 뭐든 둘이 함께 즐기기를 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서로를 위해 시간을 내고 즐거움을 나누려는 자세,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바라는 것이지.
결혼은 상대에 대한 배려와 다양하고 깊은 경험의 공유를 바탕으로 행복해진다는 기본을 배울 사이도 없이 덜컥 장가를 들어 아이 낳고 집 늘리며 이날 이때껏 잘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실상 부인들이 졸업을 원하는 결혼생활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기나 하는지?
하긴 어쩌면 어디선가 한국의 남자 고등학교 동창들이 모여 앉아 부인과의 공감대의 부재를 들먹이며 결혼 졸업장을 논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어떤 남편감, 부인감으로 키우고 있는 것일지 곱씹어 보게 된다.

김유경 / Whole Wide World Inc.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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