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값진 삶

2007-09-2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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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큰 분이 가셨다. 열정도, 능력도, 통도 컸던 분이 가셨다. 마음 또한 아름다운 분이 가셨다. 봉사심이 남다르고, 손길이 따뜻하고, 무엇보다 신심이 올곧던 님이 하늘나라로 훨훨 떠나갔다.
북가주의 유명한 사회학자이자 봉사자였던 송영인 교수가 타계했다. 칼스테이트 교수이며 이스트베이 노인봉사회 설립자로 향년 53세, 학문과 사회적 영향력이 한창 완숙할 나이에 서둘러 가신 것이 가슴 아프다. 개인적으로도 지난 15년간 지척에서 서로 도와오던 신실한 동역자였다.
그녀는 1.5세로서 이민자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큰 학문적인 업적을 이루었다. 20~30년 전 만해도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 이민들은 연구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주류사회의 무관심과 함께 아시안들은 모범적인 이민이란 모순된 편견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 때 소외된 계층, 특히 가정 폭력으로 고통 받는 여성들의 실태를 조사한 그녀의 첫 연구서가 1986년에 출간되었다. 큰 반향을 일으켰던 ‘침묵의 희생자’다.
이 연구서로 인해 주와 연방정부의 아시안 이민자 프로그램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한인 여성 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재활교육 프로그램들이 신설되었다. 연이어 나온 책이 ‘아메리칸 모자이크’였다. 이는 1980년대 후반 미국 내 여러 소수 민족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시기와 절묘하게 맞아 학계에서 크게 각광을 받았다.
내가 처음 송 교수를 만날 무렵 그녀의 영어이름 ‘Young Song’에서 밝고 신선한 노래 소리를 듣는 듯 했다. ‘젊은 노래’란 뜻도 역동적이면서도 낭만적인 그녀의 성격과 잘 맞았다. 1995년 그해 송 교수와 절친한 CPA 박영우씨와 함께 워싱턴 국립묘지에 세워질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 조형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역사적인 사업에서 그녀는 미국 내외 한인 커뮤니티의 모금을 책임 맡았다. 그녀의 열정과 추진력은 대단했다. 주위의 모함이나 이 사업을 빌미로 이득을 취하려는 일부 기업들의 술수를 거뜬히 이겨내고 1년 남짓한 기간에 100만달러를 모금했다. 미국 주최측 인사들도 놀랐다. 개막식이 있던 날 양국 대통령들도 참석한 백악관 연회에서 능력 있고 당찬 한국의 딸의 기상을 높이 알리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송 교수는 학문적·사회적 업적도 뛰어났지만 그녀의 진면목은 작은 일, 어려운 사람들을 접할 때 더 빛이 났다. 갈 곳 없는 한인 노인들을 위해 노인 봉사회를 설립하면서 자기 집을 담보로 현 건물을 구입할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그리고 몇몇 자원봉사자들의 도움만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매일 무상으로 수백명 어른들에게 점심도 대접하며 열심을 다해 노인들을 섬겼다.
그런데 그녀 속에 내재한 한 인간으로서의 용기는 그녀가 전혀 뜻하지 않게 폐암에 걸려 투병생활 할 때 더 밝히 드러났다. 평생 모든 일이 순탄하게 이루어져 가던 2003년 여름,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남편 현승일 국회의원과 함께 힘든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하나님께 낫기를 간구하였다. 걱정은 하나님께, 치료는 의사에게 라는 긍정적인 태도로 1년여의 항암치료 결과 암 덩어리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후 꼭 4년을 더 살고 세상을 떠났다. 마치 유다의 선한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들으시고 생명을 연장해 주신 그 역사처럼 말이다. 연장된 삶을 살면서 송 교수는 신앙 간증서를 통해 많은 암 환우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이웃들에게 영적으로 승리하는 참 신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송 교수는 하나님 섬김과 이웃 사랑의 ‘젊은 노래’를 힘써 부르다간 자랑스러운 한국의 딸이자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고이 잠드소서.

김희봉 수필가/환경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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