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정환 신부의 한국인 사랑

2007-09-1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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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980년 즈음 전북대에서 강의를 할 때 그 부근 임실에서 벨기에 신부님이 농민들에게 치즈 만드는 법을 가르쳐서 그 상품을 호텔에 납품한다는 말을 듣고 그 사연을 자세히 알고 싶어 했었다. 그런 후 25년 이상이 지난 지금에야 지정환 신부(디디에 세스테벤스 신부)의 헌신적인 삶을 알리는 책( ‘치즈로 만든 무지개’)이 나와 그의 생애의 자세한 내력을 알게 되었다.
1959년에 28세의 나이로 한국에 온 지 신부는 부안에 발령을 받고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 바닷물을 막고 땅을 개간하여 30만평을 그들에게 분배하였다. 과로로 병이 들어 귀국한 후 다시 임실에 온 그는 토지가 척박하여 농사도 제대로 못 짓는 그곳 주민들이 술과 노름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고 고지대에 많은 풀을 이용하여 산양을 기르게 했고 남아도는 산양 젖을 이용하여 유럽에서처럼 치즈를 만들기로 했다.
치즈 공장을 짓고 원시적으로 만들어 보았지만 전문지식이 없어 3년 동안 실패를 거듭하다가 지 신부는 3개월간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를 다니며 치즈 생산 기술을 배워 와서 드디어 1969년에 프랑스 치즈(정환 치즈)를 만들어 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치즈를 생산한 것이다.
그는 산양을 젖소로 바꾸고 그 우유로 체더치즈와 피자에 넣는 모짜렐라 치즈까지 만들어 그것을 호텔과 외국인들에게 팔기에 이르렀다. 그는 처음부터 농민들이 참여하고 이익을 분배하도록 조합을 만들었고 1972년에는 임실치즈 협동조합이 탄생했다. 그는 급한 자금을 원활히 돌리고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하였고 전라도 전체를 다니며 신용협동조합을 보급했다. 그와 함께 농민들의 교육에 힘썼다.
유신 반대운동에도 참여했던 그는 치즈와 신용협동조합으로 농촌을 살린 덕택에 강제 추방되지 않고 한국에 남았다. 그러나 다발성신경경화증에 걸려 1981년에 한국을 떠났다가 1983년에 장애자가 되어 다시 돌아와 이번에는 장애인 사목 지도신부가 되었다. 그는 ‘무지개 가족’ 공동체를 만들고 중증 장애자들과 봉사자와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재활과 자립을 위해 인내와 사랑으로 돌보았다. 그들에게는 가족적인 사랑과 유대가 절실하기 때문에 아픈 사람과 건강한 사람이 함께 가족으로서 생활하는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장애인인 지 신부 자신이 잘 알았던 것이다.
그들의 헌신적인 봉사는 차츰 주의의 도움을 얻게 되었고 시설이 갖춰진 ‘무지개 가족의 집’을 갖기에 이르렀다. 치즈 만들 때부터 장애자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지 신부는 신분과 종교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을 환영했다. 마침내 2002년에 그는 호암상 사회봉사상을 받았고 그 상금과 다른 수입을 모아 ‘무지개 장학재단’을 만들어 지금은 장애인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임실의 절망적인 가난을 바꾸려고 시작한 치즈 생산은 지금 임실을 한국 치즈 산업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사회로부터 외면당했던 무수한 중증 장애인들이 다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당당히 살아가고 있다. 한국에 온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는 이분은 퇴임 후 현재 역대 프랑스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정리하여 시디롬으로 제작하는 작업을 하며 한국 천주교사의 자료를 만들고 계시다.
국적과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여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바친 고통과 고생의 삶을 그는 “나는 다만 그들과 함께 했을 뿐”이라고 표현한다. 그가 사랑을 실천한 것은 예수처럼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통과 기쁨에 진심으로 동참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분은 진정한 가톨릭 신부이고 한국인에게는 시성을 받는 세계적 성인 성녀보다 더 귀중한 사랑의 증인인 것이다. 우리도 그의 삶을 본받아 나 자신과 남을 구하는 넓은 사랑으로 우리 주위의 문제를 찾아 해결해 나가야 하겠다.

이연행 / 불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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