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unfiltered’는 거르지 않은 ‘거친 와인’

2007-04-1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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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에 ‘unfiltered’라고 쓰인 와인들을 종종 보게 된다. ‘도사급’이라면 모를까 와인에 입문하는 ‘초짜’들로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또는 일반 와인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길이 없을 것이다. 물론 뜻을 모르니 마셔볼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고. ‘unfiltered’는 글자 그대로 와인의 찌꺼기를 완전히 ‘거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와인도 맑지 않고 뿌열 것이다.
포도를 따다가 그릇에 담가 으깨 놓으면 2~3일 이내에 부글부글 끓으며 알콜로 발효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또 며칠을 그대로 두면 박테리아들이 모여들어 신맛 강한 사과산을 부드러운 젖산으로 바꾸는 2차 발효 현상이 일어난다. 그로부터 또 며칠을 두었다가 그릇 속에 그득하게 고인 액체만 병에다 따르고 마개를 막아 두면 집에서도 손쉽게 마실 수 있는 자연산 포도주가 탄생된다.
이렇게 만든 병속의 포도주에는 신나게 콜을 만들다가 알콜 농도가 짙어져 죽어버린 이스트(효모)들의 잔해들이 둥둥 떠다닐 것이고, 신맛을 부드럽게 만들던 박테리아뿐 아니라 포도 껍질 등 온갖 이물질들이 그득하게 차 있을 것이다. 그래서 와인을 생산하는 와인 제조업자들은 2차 발효가 끝나고 오크통 속에 들어가 적당히 익은(숙성 과정) 포도주들을 고은 채(필터)에 거르거나 원심분리기 등을 이용해 이물질들을 제거한 후 병속에 담아 시장에 내놓게 된다.

2차발효 끝나고 오크통서 숙성된후 정제하지않고 출시
“고유의 향·맛·색 그대로 살아있어” 애호가들에 인기
“박테리아탓 장기 보관땐 상한다” 일부 와이너리선 반대

이때 필터를 사용하지 않고 원심분리기 등을 이용해 이물질을 부분적으로 제거한 와인을 ‘unfiltered’ 와인이라고 하고 레이블에 글자로 새겨 넣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지저분한 찌꺼기가 그래도 남아 있지 않겠는가 의심하며 마시기를 꺼려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와인의 고유 향과 맛, 그리고 색이 여과돼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며 오히려 일반 와인보다 더 즐긴다.



<색이 뿌연 두종류의 ‘unfiltered’된 화이트 와인>

캘리포니아에서는 90년대 초반부터 ‘거르지 않은’ 와인들의 인기가 치솟아 유명 와이너리 로버트 몬다비 등에서는 ‘거르지 않은’ 와인 생산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와이너리들은 “고운 필터로 거르지 않은 와인을 장기 보관한다면 결과는 뻔하지 않겠느냐”며 반대론을 펼치며 갑론을박하는 추세다. 결국 박테리아 등이 그대로 담겨져 상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포도주 학자(enologist)들의 결론은 이렇다. 거르는 것과 거르지 않는 것의 맛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fining’ 정제·술 맑게 하기
얼마 전 LA타임스 푸드 섹션에 와인의 ‘fining’ 과정이 소개됐는데 내용이 무시무시해 읽어본 독자들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연방의회가 2004년 통과시킨 ‘식품의 성분 분석표 의무화‘를 와인에 적용시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것이지만 와인 제조과정을 모르는 초짜들로서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병에 담아 마켓에 내보내기 전에 와인 속에 남아있는 효모 등 각종 단백질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하거나 타닌을 순화시키기 위해 특수 물질을 첨가하는 것이 사실이다. 계란 흰자위의 알부민을 넣거나, 흡수제로 사용하는 벤토나이트(화산재로 구성된 점토), 카제인이 들어있는 우유 가루(스킴 밀크), 철갑상어 부래 갈아놓은 가루, 나일론, 차콜 등 단백질 흡착력이 높은 물질들을 투입해 술을 맑게 하는 것이다. 신문은 아예 와인 제조업자들이 정제과정에서 ‘닭, 우유, 생선’을 집어넣는다고 약간 ‘뻥’을 튀겨 과장 보도했다. 이런 물질들이 자칫 앨러지를 유발할 수 있으므로 연방정부는 와이너리들이 레이블에 이를 명시해 놓도록 하려고 한다는 내용의 보도이다.
물론 색깔이나 산의 함유량을 맞추기 위해 포도 색소나 타르타르산을 집어넣고 알콜 농도를 높이기 위해 알콜 첨가(프랑스에서는 승인됨), 알콜 농도를 낮추기 위한 물 첨가(미국서는 승인) 등 저가 와인 제조업체들이 온갖 술수를 쓴다는 내용도 함께 보도되기는 했지만 인체 유해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사실 ‘거르기’ 과정도 ‘정제’의 한 가지 방법인데 정제를 하지 않은 와인은 액체가 뿌옇게 될 수밖에 없다. 가끔 레이블에 ‘unfiltered’ ‘unfined’라고 쓰여 있는 와인들도 있는데 그 맛의 차이는 맛을 봐야 알므로 유사한 가격대의 일반 와인과 함께 구입해 동시에 마셔 보는 것도 색다른 와인의 세계를 맛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김정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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