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해가 되었다.
기쁘고 좋다. 새것이라서 좋다. 우리는 새것을 좋아한다. 새 옷을 좋아하고 새 차도 좋아하고 새 집도 좋아한다. 그래서 새 해도 좋기는 하지만 한편 두렵기도 한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이 한 해를 또 어떻게 잘 살 수 있을까. 선물로 받은 2006년, 우리 죽지 않으면 여전히 살게 될 것인데.
그러나 다만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다. 인생을 좀더 건강하게, 좀더 아름답게, 좀더 충실하게, 좀더 지혜롭게, 그리고 좀더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 아닌가. 인격이 없는 부(富), 인격이 없는 권위, 인격이 없는 권세, 인격이 없는 지식, 인격이 없는 성직자, 인격이 없는 연륜, 이것은 이미 맛 잃은 소금이다.
세상에 사는 사람은 많아도 참되고 아름답고 보람있게 사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우리는 바로 살기 위해서 그 무엇보다 우선 생각할 줄 알아야 하겠다. 우리의 육체가 영양 있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살찔 수 있는 것처럼 사색에 의하여 내면적인 생명이 풍부해진다. 그러므로 사색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하겠다. 행복은 옳은 행동에서 오고, 옳은 행동은 옳은 판단에서 오고, 옳은 판단은 옳은 생각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는 시간을 잃은 채 살아오지 않았나. 바쁜 이민생활인데 생각은 무슨 놈의 생각, 행동하는 시간이 우선이지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어떤 때는 분명히 생각하는 시간이 더 귀한 때가 있다. 사실 바쁘니까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 없이 행동했으므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실수를 범하지 않았던가. 미래는 분명히 바르게 생각하고 지혜롭게 생각하는 사람이 승리자가 될 것이다. 지금은 새해 벽두 일이 시작되는 역사 앞에 서 있다. 어김없이 기록될 무서운 역사 앞에서 우리는 옳고 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겠다.
로댕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은 프랑스 혁명을 두고 만든 조각이라고 한다. 모두가 이유도 모르고 사람을 죽이며 파괴하고 야단을 칠 때 이 광경을 보고 머리에 손을 대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한 사람을 모델로 조각한 것이다.
병을 고치려고 생각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벌써 반은 나은 것이다.
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문학의 종말에 대하여 비평하면서 한 비유는 세월이 갔어도 여전히 교훈을 주고 있다. 무대는 어떤 극장이다. 그 극에 나오는 주인공인 희극 배우는 각광을 받으며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와서 침착한 음성으로 지금 이 극장에 방금 화재가 났다는 사실을 관중에게 알려준다. 그는 관중이 이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일대 혼란과 수라장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일부러 침착한 어조로 화재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거기 모인 관중들은 이것도 그 희극 배우의 하나의 코미디로 생각하여 한층 더 큰 소리로 그 배우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그런 동안에 불은 점점 맹렬히 그 극장 전체를 휩쓸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극장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전부 화염에 둘러싸여 나갈 길이 막혀 불에 타 죽을 때까지 이 갈채는 계속된다.
생각하는 사람은 재난 속에서도 기회를 만난다. 그러나 생각이 없는 사람은 모든 기회 속에서 재난을 만나고 마는 게 아닐까.
박석규/은퇴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