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워싱턴 DC에 불어닥친 부동산 붐이 한인 상인들의 생활터전을 빼앗아가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몇 년만에 집 값이 대여섯 배로 뛰면서 백인들이 다시 워싱턴 DC 중심가로 되돌아오고 있으며, 이런 와중에서 흑인·히스패닉 상대로 그로서리, 리쿼 스토어 등을 운영하던 한인 상인들이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DC 중에서도 최근 몇 년간 재개발 바람이 가장 심하게 불어닥친 곳은 노스웨스트 흑인지역이다. 특히 14th 스트릿 NW와 T 스트릿이 만나는 지역 일대는 4~5년 전만 해도 ‘마약촌’으로 악명을 떨쳤지만 2~3년 전부터 불어온 부동산 붐과 함께 백인들이 대거 이주해 오면서 주민 구성이 거의 완벽하게 바뀐 곳이기도 하다.
워싱턴포스트는 13~14일 이틀에 걸쳐 14th 스트릿 NW 일대의 변화상을 소개했다. 이 신문은 지역 인구의 변화와 더불어 현지에서 장사를 하다 최근 ‘쫓겨나가고’ 있는 한인 상인들의 근황도 전해 주었다.
14th 스트릿과 T 스트릿이 만나는 코너에서 10년간 ‘파라다이스 리쿼 스토어’를 운영해온 민병인씨는 지난달 가게에서 쫓겨나야 했다. 세든 빌딩의 주인이 최근 한인에서 백인으로 바뀌면서 새 건물주는 기존 월 2,200달러의 임대료를 무려 1만2천달러로 여섯배 가까이 올리겠다고 일방 통보했다. 10월24일로 리스가 끝났기 때문에 민 사장은 말 한마디 못하고 가게를 비워줘야 했다.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민 사장은 14일 “10년간 리쿼 스토어를 운영했으니 리스만 재계약됐다면 권리금을 60만~70만 달러는 받고 팔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임대료를 여섯배나 올리는 것은 ‘나가 달라’는 소리이므로 협상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자신은 권리금 한푼 못받고 가게를 비웠지만 장사는 계속 해야 했기에 민씨는 아직도 흑인이 다수 거주하는 DC 노스웨스트의 1가와 케네디 스트릿이 만나는 지점의 기존 리쿼 스토어를 권리금을 주고 인수했으며 이번 주말쯤 오픈할 예정이다.
민씨는 “10년간 한 자리에서 장사하면서 주위 한인들은 ‘세든 빌딩을 사들여라’고 조언했지만 그때마다 경제 사정이 여의치 못해 미뤄왔는데 결국 빌딩이 팔려나가면서 가게만 문을 닫는 결과가 됐다”며 아쉬워했다.
현재 DC 노스웨스트의 T 스트릿 지역은 과거의 마약촌 이미지를 벗고 완전히 탈바꿈 중이다. 서쪽의 17번가부터 개발 붐을 타고 백인 거주자들이 늘기 시작하더니 16, 15가를 거쳐 14번가까지 거주민의 95% 이상이 백인으로 교체된 것이었다.
현지의 한 한인 부동산 중개인은 “서세동점(서쪽 세력이 동쪽으로 쳐들어 옴)이라는 말 그대로”라고 평가했다.
한 한인 부동산 에이전트는 “과거 10만 달러에도 못 미쳤던 14번가 일대의 집값이 최근 60만 달러 선까지 치솟으면서 흑인들이 모두 집을 팔고 타 지역으로 이사가면서 생기는 현상”이라며 “주민 구성이 바뀌면서 백인 상권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인 상인들이 타 지역으로 쫓겨나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고 전했다.
부동산 주인이 바뀌면서 잘 운영되던 기존 가게에서 쫓겨나간 한인 상인 케이스는 민씨뿐이 아니다.
DC 남동부의 8관구 지역에서 가게 실내면적만 1만 스퀘어 피트에 달하는 대형 그로서리를 운영하던 한인 이모 사장 역시 리스 기간이 끝나면서 2주 전 새 건물주가 “대형 수퍼마켓을 입점시킬 예정이니 나가달라”고 하는 통에 가게를 비워줘야 했다. 인근 한인 상인들은 “리스만 갱신할 수 있었다면 권리금을 1백만 달러 이상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아쉬워하고 있다.
차명학 워싱턴비즈니스협회 회장은 “DC 내 한인 상인 숫자가 매년 줄고 있다”면서 “맥주 낱병판매 금지법안에 대항하기 위해 DC 남동부 8관구 지역을 최근 방문했는데 그로서리의 절반 정도는 한인들이 운영할 것으로 예상했었지만 타민족들의 상권 침투로 실제로는 한인 점유율이 35% 정도에 불과한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협회의 김세중 전 회장은 “DC에서 장사하는 한인들 중에는 부동산 붐에 맞춰 세든 빌딩을 사들임으로써 영업을 계속하는 한편 부동산 값 상승의 효과를 본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급상승한 임대료 탓에 가게를 비워주는 경우가 최근 자주 발생기고 있다”고 전했다. <최영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