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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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띤의 스페인어 회화와 중남미 문화 산책 ¡Hola! amigo

2005-10-0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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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 남미 ABC 3국과 스페인 제국

제416회. 스페인 제국 21. 무적함대의 패퇴 5

헨리 8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는 후일 영국과 결혼한 처녀 여왕, 훌륭한 여왕으로 불렸으나 그녀에게는 서너명의 애인이 있었고, 결혼을 안한 것은 권력욕이 애정보다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치세 때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영국의 대서양 시대를 열었으며, 1600년에는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인도로의 진출로를 마련하였고, 1559년에 통일령을 내려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확립시켰다. 또한 경제를 발전시켜 대영제국의 초석을 놓았으며 해운과 교역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평가된다. 제법 괜찮은 통치자였다.

잉글랜드를 직접 공격하는 것만이 모든 문제를 일시에 해결해 줄 것으로 판단한 펠리페 2세는 결국 영국 응징에 나섰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근 2년에 걸친 준비 후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지휘 아래 1588년 5월 제 2의 레판토 해전을 위해 리스본을 출항하였다. 돛대에 십자가와 성모의 상이 그려진 군기를 내걸고서. 1만9,000명의 병사와 8,000명의 선원 그리고 2,400문의 포를 장착한 130척의 함대, 그 중 45척은 전함이고 나머지는 수송선 및 소형 선박이었다. 당시로서는 가공할 만한 전력이었다.
영국도 100척에서 200척에 이르는 함대를 투입하여 비슷한 전력이었고, 그 중 40척만 전함다운 전함이었다. 에스파냐 함대는 자국의 함선이 영국 전함보다 속도가 느리고 함포에서 뒤진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일단 충돌한 다음엔 우세한 보병이 판세를 역전시킬 것을 기대하였다.
드레이크가 지휘한 영국함대는 탑승한 병사 수는 적었으나 함포 성능이 우세하여 스페인 함선들을 원거리 포격으로 공격할 생각이었다.
전투는 1588년 7월29일부터 몇 차례에 걸쳐서 벌어졌다. 영국 전함들은 7월31일 플리머스 해전, 8월2일 포틀랜드 빌 해전, 8월4일 와이트섬 해전에서 원거리 포격으로 스페인 함선을 공격했으나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지는 못하였다.
8월7일 밤 영국측이 화공으로 공격하자 스페인 함대는 대해로 도피하였고 8일 새벽 영국 전함들은 칼레 부근에서 대열이 흐트러진 스페인 함대를 먹이로 총공격을 퍼부었다. 무적함대는 심각한 손실을 입었으나 패퇴한 것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무적함대의 패퇴는 북해의 강풍에 의해서였다. 북해의 강풍에 내몰린 무적함대는 지리멸렬되어 함대는 분산되고 스코트랜드와 아일랜드로 밀려갔으며 해안에 접근도 못하고 파선하거나 격파되었다. 전투는 결국 무적함대의 참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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