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주홍색 풍금

2005-06-28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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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삶

▶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밝고 고운 소리를 내는 풍금이 피난에서 돌아온 허탈하고 지친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리 집은 폭풍우가 지나간 것처럼 어질러져 있고 가구는 모두 사라진 텅 빈 집이 되었는데 유독 뒷방의 풍금만이 맑은 주홍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저런, 감탄과 감격의 환성이 억울한 감정을 조금은 어루만져 주었다.
지독한 것들. 우리 윗집 높은 돌담집 주인과 마나님은 국군을 숨겨줬다고 명수대 연못에 목매달아 죽임을 당했다. 삼촌은 육남매를 남겨놓고 이북으로 갔다. 흰 중절모에 흰 양복을 입고, 광채 나는 흰 구두를 신은 그 당시 최고 멋쟁이 신사로 기억된다. 전쟁 전에 미국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왔다니 그야말로 인텔리에 최고 부르조아였을 것이다.
모두들 풍금을 좋아라고 쳤다. 나는 풍금에 손도 대지 않았다. 마치 풍금이 나와 집의 모든 것을 맞바꾼 것만 같았다. 아니, 그것이 모든 것을 다 내주고 저만 남아 있겠다고 했을 거라고 어린 마음을 골나게 했을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글을 읽을 줄 몰라서, 셈을 셀 줄 몰라서 학교가 싫었다. 하루는 나보다 댓 살 위인 소년이 수류탄을 가져와서 몰래 화장실에서 놀다가 터졌다. 나는 그의 흰 살점이 붙은 벽을 보고 나서는 더욱 학교가 싫어졌다.
나에게 가장 귀중하고 위로를 주는 것은 영국군이 준 구형 재규어 같은 푸른색 택시였다. 나는 늘 이 택시를 학교에서 집에 오면 끼고 놀았다. 가교로 새로 이은 한강 다리를 건너려면 작은 발자국도 큰 소리를 냈고 지나가는 트럭들은 천둥소리를 냈다. 마음이 내 발걸음보다 더욱 콩당콩당 뛰었다. 그리고 강 건너 전차를 탔다.
세월이 가서 풍금을 치던 형제들이 다 갈 길로 떠나고, 집에는 나와 덩그러니 주홍색 풍금만이 남게 되었다. 나는 그 푸른색 재규어를 잊은 지 벌써 꽤 오래 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발판에 놓아 보았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그 반들한 뚜껑 위에 어렴풋이 내 얼굴이 보였다. 바보 같은 얼굴. 아무 것도 제법 하는 것이 없는 나. 글쎄 그렇게 재미나는 소설을 읽어 주며 그 시간을 그렇게 기다렸던 나에게 그 선생은 대망의 학예회 때 나에게 한 줄의 대사만을 주지 않았던가. 나는 외톨이임에 틀림이 없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풍금을 탔다. 풍금은 기쁜 소리, 슬픈 소리를 내 주었다. 나는 한참 후에야 풍금의 구석에 총탄이 관통한 큰 상처를 보았다. 아, 그랬구나. 이 주홍색 풍금은 자기의 가슴으로 우리의 집을 지키고 있었구나. 이제 총소리는 멈추었다. 아버지, 형제, 친척을 넘어뜨렸던 전쟁이 끝났다고 했다.
그래도 남과 북의 젊은이들이 총칼을 세우고 섰는 전선이 있고, 지뢰밭과 철조망이 있다. 이북 병사는 몰라도 국군 병사는 키가 훨씬 큰 튼튼한 장병이다. 글을 모르는 병사도 거의 없다. 불행하게도 가상의 적은 얼마든지 있다. 국가를 지키는 신성한 의무는 절대적인 국민된 도리다.
나의 풍금은 지금 어느 시골 학교나 마을 교회로 갔다. 풍금은 나를 풍성하게 자라게 했다. 나는 풍금이 간직한 총상을 내내 간직하고 있다.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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