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주 민주운동사(1)

2005-06-19 (일)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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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기고

▶ 고세곤/메릴랜드 거주 .전 구국향군 부사령관

오늘날 한국의 민주와 자유는 민주인사들의 투쟁의 결과이다. 인권, 자유, 평등 개념을 근대화 과정에서 훼손되고 후퇴 현상을 경험하면서 반전시킨 주역은 한국 민주화 성전의 용사들이었다.
미주 지역의 민주화운동은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발행하면서 봉화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대중조직으로 독립협회, 만민공동의회를 조직하고 근대 민주주의를 시도한 것이다. 이런 민주운동은 수구파와 친일파들의 방해로 중단되었다. 이 고난을 안고 서재필은 제2차 미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리고 곧 이승만을 미국으로 초청했다.
이승만은 1920년대에 미국 수도 워싱턴 DC의 16가 NW로 옮겨왔다. 구미위원부는 상해 임시정부 규약에 따라 워싱턴에 위치해야 했다. 구미위원부의 일은 서재필의 영어가 능통한 관계로 미 정부나 의회와 연대해 나갈 수 있었다. 비용은 주로 의사였던 서재필이 담당했고 임병직도 홍차를 팔아 보조했다.
한편 서 박사는 독립신문을 국내외에 보냈는데 많은 재산을 사용하므로 딸에게 초라한 집 한 채만 남겼을 뿐이다. 당시 세계 사조는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규탄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갔다. 세계 1차대전 직후에는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면서부터 약소국의 독립투쟁을 격려하였기에 국내 독립투사들은 해외로 망명하는 사람이 많았다.
독립신문은 최신 정보를 제공하여 국제정서를 홍보하고 투사들에게는 지식의 보급창이었다. 당시 임창영은 한인으로는 유일한 ‘The New York Times’ 기고자였고, 한국문제 전문가로 잘 알려져 있었다. 임창영은 독립투사의 아들로 소년시절부터 서재필을 좋아했다고 한다. 임창영은 서재필의 비서였으며 동지적 결합으로 독립투쟁과 민주사상으로 굳어졌고 미주 한인 독립투쟁의 중심부를 이루어 나갔다.
서재필 서거로 바통을 이어받은 임창영은 자유당 독재와 또 한번 마주친다. 옛 구미위원부 동지들마저 자유당 요직을 맡아 갔으나 이 박사가 임창영을 주미대사로 임명한 것도 거절하고 홀로 남아 서재필의 사상을 키워 나갔다.
이승만 독재는 물러나고 4.19로 새로 탄생한 장면 정권의 주 유엔대사로 재직하다 8개월만에 군사혁명으로 직위해제 당한다. 그의 본직인 대학교수로 복귀했다. 그 후 계속 군정반대운동으로, 야당의 정책자문으로 ‘국민의 소리’를 발행하고 문서로도 투쟁했다.
그 당시 유엔 총회에 갔던 대표단 가운데 이철승과 양일동은 5.16 군사혁명으로 하루아침에 정치고아가 되었고 백악관 앞에서 군정반대 시위를 함으로써 최초 군정반대 데모로 기록하게 되었다.
워싱턴에 남은 이철승은 코네티컷 애비뉴의 아파트에 머물면서 민국동지를 규합해서 민주협회를 만들고 동아일보를 지원했다. 1969년 여름 본국에서는 3선개헌 저지운동이 한창일 때, 9월 백악관 앞에서 교포 50여 명이 모여 3선 반대투쟁을 선언했다. 당시 ‘워싱턴 포스트’지는 사진과 함께 기사로 크게 보도했다.
이 데모는 치과의사 노광욱 박사와 김광서 박사(조지워싱턴대학)가 중심이 되었다. 그 후 한인회장 선거는 노광욱 씨가 후보연설도 없이 노래 한번 부르고서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상대 후보도 교수로 경륜도 있었으나 친정부로 낙인 찍혀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로써 교포사회는 친정부, 반정부로 나뉘어졌으며 삼선개헌을 반대한 사람들끼리는 반정부 성향으로 동지적 결합이 생겼고 반정부운동의 모체로 이어져 갔다. 한국대사관은 반정부를 소외시키고자 대사관 초청파티에서 제외시키는 새로운 관례를 만들어냈다.
고세곤/메릴랜드 거주 .전 구국향군 부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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