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2005-05-03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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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삶

▶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한송이 꽃을 피우기 위하여 작은 씨앗은 남 모르는 세월을 캄캄한 땅 속에서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던 것일까. 그리고 짓눌리는 세상의 무거움을 헤쳐 나오기 위해 그렇게나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던 것일까. 고운 푸른 새싹이 돋아나서 부지런히 줄기를 내고 꽃망울을 내기까지 슬프고 괴로웠던 계절은 얼마였을까.
4.19. 누나 친구는 붉은 선혈을 토하고 학교 뒷동산 낡은 비석에 겨우 이름 석자를 남기고 가버렸다. 19세. 나는 5.16에 탱크가 서울로 진입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숨을 쉬며 수많은 어린 영혼을 밟고 태어났다. 우연히도 살아남은 사람은 슬픈 추억을 잃어버린 채 민주 정치의 도박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나는 꽃 한송이를 사랑으로 본다. 사랑은 꽃 한송이처럼 피어나기 때문이다. 사랑은 꽃처럼 시들어 간다. 그래도 사랑이 지워져 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세월 속에 묻혀갈 뿐이다. 그래서 언젠가 또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 산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우리 모두가 꽃을 피우기 위해 태어났다. 생명을 다하기까지 반드시 꽃을 피워야 한다. 한 소년의 아버지는 동료 30여 명의 생명을 구하고 산화했다. 전쟁에서 피어나는 꽃은 더욱 강렬한 빛을 낸다.
사랑과 생명은 끝이 있다고들 한다. 생명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고, 사랑이 없으면 생명은 있으나 마나 다. 생명과 사랑을 함께 공유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신은 우리에게 생명과 사랑을 꼭 같이 선물로 주셨지만 사랑만은 선택의 여유를 더하셨다. 선택은 자유이다. 생명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사랑은 구름처럼 떠간다. 생명이 멈추는 곳에는 죽음이 있고, 사랑이 멈추는 곳에는 고독이 있다. 사랑과 생명이 합치는 곳에 꽃은 우아하게 피어난다. 그리고 단단한 열매를 맺고 씨앗이 되어 땅속에 묻힌다. 오랜 엄동설한을 겪은 후에야 새 싹을 내는 것이다.
한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우리는 얼마를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양민교/의사.리치몬드,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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