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육십 평생 고생만 시켜서 정말 미안해.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면서 당신을 현혹시키고, 개같이 벌어서 나중에 정승같이 쓰자며 당신에게 희생을 강조해서 정말 미안해.
여보, 정말 미안해. 자식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뒤로 미루자고 해서 정말 미안해. 나같이 무능한 남편을 믿고 삼십여 년을 따라와 주어서 정말 미안해.
남편과 아내가 부딪치면 일단은 여자가 먼저 져주어야 한다고 강조해서 미안하고 남편을 뭉개는 것은 바로 아내인 자신을 뭉개는 것이라고 억지를 부려서 미안해. 지나놓고 보니 전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많이많이 미안해.
아내는 안해로서 집안의 해처럼 항상 따뜻해야 한다고 억지 주장을 해서 미안하고, 여자가 옛날 칠폭 치마를 입었던 것은 집밖에서 고생하고 들어온 남편과 자식들, 어미 암탉처럼 따뜻하게 품어주라는 것이라고 무리하게 천사표를 강조해서 미안해.
지나놓고 보니 하나에서 열까지 당신만 밀어붙여 미안해, 정말 미안해.
꼴에 남자라고 당신 위에 항상 군림하려해서 미안하고, 어떨 때는 내가 실수하고 잘못한 것 뻔히 알면서도 기죽기 싫어서 아니라고 뻑뻑 우겨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남자라서 미안해.
여보, 미안해. 이제라도 당신을 보호해주어야 하는데 내가 중병에 걸렸으니 당신 두고 먼저 갈 것 같아 미안해.
여보,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당신 밥하고 설거지 할 때 신문만 봐서 미안해. 당신이 동동거리며 일할 때 한눈 팔고 딴 생각만 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꼴에 남자랍시고 작은 것에 충실하지 못하고 더 큰 것만 생각해서 미안해. 내가 일 저질러 깨빡친 돈만 해도 당신 좋아하는 다이아몬드로 휘감아 줄 것인데 결혼식 때 해준 금반지까지도 우리가 어려울 때 팔아먹어서 정말 미안해.
신혼 여행이라고 기껏 서울에서 온양 현충사까지밖에 못 데려가서 미안해.
여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 헛 욕심을 미래의 꿈이나 포부로 착각해서 미안해.
아내는 집안의 종이어야 하고 남편은 처자식의 머슴이어야 한다고 우겨서 미안하고, 부모세대는 자식세대의 거름이 되어야 한다고 희생을 강조해서 정말 미안해.
지나놓고 보니 내가 우리집의 기둥이 아니고 당신이 받침돌이고 기둥이었어.
이제 보니 당신의 희생 위에 내가 있었고 당신의 헌신 위에 아이들이 성장했구려.
오늘도 당신은 피곤할 테니 빨리 올라가 자라는 내 말을 듣지 않는구려. 신문을 볼 때도 TV를 볼 때도 당신은 내 옆에서 마늘을 또 까고 있구려.
여보, 우리 이제 천사표 그만 합시다. 이제 우리 우리를 위한 삶을 살아갑시다. 자식들도 이제 거의 다 컸지 않았오? 자식들 쪽에서도 당신의 희생이 부담일 거요.
여보, 우리 이번 고비 잘 넘기고 병이 나으면 항상 미루느라 못해본 세계여행도 하고, 백두산 금강산도 가보자구요. 천년 만년 살 줄 알고 당신 너무 고생만 했구려.
내 옆에서 항상 불안 초조해하고 어떨 때는 오버한다고 나한테 야단맞던 당신. 이젠 내겐 당신밖에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민다오.
여보, 당신 사랑 해요. 그리고 정말 미안해요. 당신때문에라도 오래 살아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