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충렬사 여행
2004-07-28 (수) 12:00:00
정상대 <수필가·훼어팩스, VA>
사람은 역사를 먹고사는 동물이다. 지나간 조상님의 살아가신 발자취를 더듬어 보며 잘못된 것은 고치고, 더 살기 좋고 부강한 나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후손들의 책무이며, 하늘이 그런 민족에게 복을 내려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50년대 말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이다. 그때 문교부에서 역사의 인물들을 큰 도화지에 천연색으로 그려 한 권의 괘도를 만들어 각 학교마다 배포했는데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이 가장 인기가 있었다. 내용물은 이러했다. 유성룡 장군과의 어린 시절, 거북선 만드는 모습, 왜적과의 해전 장면, 원균의 모략으로 감옥생활, 조정의 무능, 당파싸움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삼도수군통제사로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시조, 막내아들 ‘면’의 장렬한 전사에 비통해 했던 아버지의 모습, 중국과의 연합으로 일본 해군이 패퇴하고 있는데 다시는 조선의 재진입을 엄두도 못 내게 선두지휘 하시다 적의 유탄에 맞아 쓰러지셨다. 그때 옆에 있던 장남과 장수들에게 “방패로 나를 막아라. 싸움이 한창이니 내가 죽었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 이야기다. 산골에서 태어나 처음 관광버스를 타고 마산으로 갔다. 그때만 해도 통영까지 관광선이 없던 때라 큰 어선을 하나 임대했다. 선장은 해상 파고, 날씨 등 뱃길 여행에 문제가 없을 거라고 설명해줬다. 뱃고동 소리와 함께 고기 비린내 물씬 풍기는 마산항을 떠난 배는 통통거리며 가덕도, 거제도를 향했다. 급우와 배 뒤편에 앉아 바다에서 튀어 오르는 파도를 손으로 받아 소금기 바닷물을 처음 맛보기도 했다. 남해안에 3,000개의 섬이 있다고 배웠지만 서로 다른 모습의 한려수도를 지나며 아름다운 금수강산 나의 조국을 체험하였던 것이다.
3시간 여 만에 통영 앞 한산섬 입구에 도착하니 큰 시멘트로 만든 거북선이 우리 일행을 맞아주고 있었다. 그때가 충무공 탄신기념일 무렵이라 수학여행 온 학생들, 여행 온 사람들의 모습도 눈에 보였다. 한산도에는 개나리, 철쭉, 큰 소나무들도 많았지만 우리에게 가장 큰 인상을 심어준 나무는 그곳에서만 자라는 동백나무였다. 잎이 단단하고 겹겹이 계속 피어 나오는 동백꽃 봉우리는 너무 아름다웠다.
충렬사 입구. 안내원이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당시 한산대첩 승리 이야기를 지형을 가리키며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설명 중 다른 사람이 우리 학급의 이순권 학생을 불러냈다. 이순신 장군의 17대 후손이라며 예의를 표하고 어디로 데리고 갔다. 나는 그때 내가 살고있는 산골에까지 어떻게 서로 족보를 알고 있으며, 시골 촌마을까지 자손이 뻗어 살고 있나 신기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충렬사 안에는 사당과 이순신 장군이 만든 각종 화포, 갑옷, 칼 등 전쟁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큰 칼들을 보자 저 무거운 칼을 한 손으로 들고 왜적과 수 시간 싸울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역시 장사였고 장군체질을 가졌던 분이구나 느꼈다.
이제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10년 이상 지나고 있다. 한민족 최고의 성웅이신 이순신 장군은 “국내에는 정책을 결정할 기둥처럼 믿음직한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재가 없으니, 도대체 나라의 운명이 어찌될지 앞날이 막막하다”고 그 당시 나라를 걱정하셨다. 장군의 ‘유비무환’의 국방정신, 전쟁 중에도 지극했던 부모님에 대한 효심,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우리는 배우고 실천, 실행해야 하고, 이 정신을 우리 만만대 후손들에게 재교육, 계속 전수해갈 수 있도록 노력함이 우리의 시대적 책임이요 명령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