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 나라의 품격
2004-07-27 (화)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나라에는 ‘국격’이 존재한다. 정통성, 품위와 권위, 봉사, 법의 엄정한 집행, 국민 등 따습고 배부르게 먹게 하는 경제발전, 외적으로부터의 조국 수호…
이런 덕목들을 잘 갖추고 있어야 품격 높은 국가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조국은 어떤 평가를 받을 만할까. 우리는 지금 나라의 품격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나라다운 면모의 상실은 곳곳에서 목격된다. 열기 오른 감성만 판칠 뿐, 상식도 양식도 땅에 묻혔다. 너무도 비상식적인 것, 너무나 비교양적인 말과 몸짓이 행세하는 나라에서 법과 정의는 시든다. 권력의 힘만이 존재할 뿐이다. 새 권력을 강고히 하기 위해 기성의 모든 것을 엎고, 과거를 끊고, 정권을 잡은 자가 곧 선이요 진리라는 자기 도취, 만용, 선동, 적의의 눈초리만 있을 뿐이다.
우리 조국의 오늘을 병리학자가 진단한다면 ‘무지와 심리 불안정에 의한 자기 집단 히스테리’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병리학자가 아닌 나는 그런 병명이 실재하는지 자신할 수는 없다. 다만 2004년 한국의 권력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현상들을 저널리스틱하게 분석해 본 실험적 정의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근거로 그런 진단을 내린단 말인가. 공연한 자기 부정과 제 나라 헐뜯는 아닌가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병폐는 곧바로 권력에서부터 나온다. 권력이 무능하면 경제가 망가지고 사회는 썩는다. 한국의 모든 길이 통하는 청와대, 그 권부의 주인이 8번째 바뀌었지만 대부분이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이는 없었다. 지금의 지도자는, 그리고 훗날은? 답변은 ‘글세 올시다’다. 주인의 품위와 격조에 따라 청와대 분위기는 결정된다. 한데 최근 아주 해괴망측한 일이 청와대 안에서 일어났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벌거벗기고 보수신문과 정사를 나누는 패러디 물이 청와대 홈페이지에 떠서 네티즌들 눈요기를 시켰다. 그 저속 패러디를 청와대 책임자가 홈페이지 상단에 잘 모셔놓고 네티즌들의 접속을 기다렸다니 이 게 도대체 한 줌의 양식이라도 있는 정권의 모습인가. 나라의 품격이 나락으로 떨어진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품격에 관한 한 정말 기절초풍할 일은 또 있었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은 독도를 일본 명칭인 ‘다케시마’라고 불렀다. 이 건 정말 있을 수 없는 망발이다. 일본 기자가 그렇게 물어와서 그렇게 대답했노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독도가 얼마나 민감한 대상인가. 한국의 자존심이 아닌가. 기회가 날 때마다 독도를 자기네 영토인 타케시마라고 우리 속을 뒤집어놓는 일본의 총리, 기자 그리고 일본인을 향해 “다케시마 문제는 적당히 넘어가자”고 대답했으니 이게 망발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일본 기자가 다케시마라고 한 것은 그에겐 당연하고 의도적이다. 그렇다면 한국 대통령의 답변은 의연하고 분명해야 한다. “당신이 질문한 섬은 독도를 말하는 것 같은 데 그곳엔 한국의 태극기가 이 시간에도 힘차게 나부끼고 있습니다”--이 정도의 말로 훈계 겸 경각심을 던졌어야 마땅하지 않았겠는가.
또 희한한 일은 연평도 근해 서해 상에서 북한 함정이 북방한계선을 불법으로 넘어왔다. 이에 우리 해군이 즉각 대응에 나서 수 차례 경고를 했음에도 남하를 계속하자 위협 경고사격을 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을 놓고 청와대가 취한 행동은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 우리 해군이 작전 내용을 은폐하고 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열을 올리면서 ‘대통령의 통수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몰아세웠던 것이다. 아니 남의 울타리를 불법 침입한 자를 응징은 못할 망정 집 울타리를 잘 지킨 자기 경비원을 되레 야단친 꼴이니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여론이 들끓자 해군책임자를 당장 옷 벗길 것처럼 으름장을 놓던 청와대가 슬그머니 후퇴는 했지만 생각할수록 해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해괴한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빨치산과 간첩 출신이 ‘민주 인사’의 옷으로 갈아입고 의문사위원회라는 국가기관 요원으로 변신한 뒤, 경찰간부, 군장성들을 오라 가라하며 위세를 떨었다. 채용시험에 합격했으니 문제될 게 없단다. 그 뿐이 아니다. 그 의문사라는 곳에선 과거 간첩 질하고 빨치산으로 체포돼 복역하다가 옥사한 사람들을 ‘군부독재에 항거한 민주인사’로 규정하고 이들 가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모진 고난을 넘어 이 나라를 지켜온 국민들을 얕보아도 유만부동 아닌가.
여론이 부글부글 끓은 것은 당연지사다. 한데 대통령은 가타부타 말이 없다. 어떤 때는 ‘막말’을 하고 말해야 할 때는 침묵하는 대통령, 그의 인기도가 썩 좋지 않은 것을 보면 표를 찍은 이들도 가슴앓이를 하고 있을 성싶다. 그러나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3김씨 따라 표 던지고, 수도권 옮겨준다고 몰표 주는 지역주의와 이기주의의 포로가 아니었던가. 이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나라 품격이 땅에 떨어졌다며 비분강개하던 이들도 이젠 지친 탓일까. 그저 부화만 끓일 뿐 3년 반이라는 길고 긴 날짜만 머리 속에서 헤아리곤 이내 한숨을 내 쉬는 것이다. 그런걸 일러 자업자득이라 했던가.
안영모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