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의 의견-서울에서 보내는 엽서

2004-07-14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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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경/ 국제회의 통역사

프라임, 그랜드, 꾸아퓌르보떼, 코스코마트, 디어프렌드, 유니티, 미르, 까꼬 뽀꼬, 옵티마, 인터피아, 에스엠 헬스, 애니팻, 에이스, 그린 마트, 투다리, 블리자드… 한글아 어디 갔니?
6호선 녹사평 전철역에서 내려 마을 버스 3번을 타고 종점까지 가면 거의 2주 동안 내가 체류하고 있는 호텔이 나온다. 마을 버스를 타고 5분도 채 안 되는 짧은 거리를 버스가 지나는 동안 창문 밖을 내다본 내 시야에 들어온 상점의 명칭들이다.
한국어도 외래어도 아닌 도대체 무슨 사업을 벌리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아리송한 이름 투성이다. 서울을 벗어난 지방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으뜸과 버금’이라는 순 우리말을 붙인 상호는 오히려 생소한 느낌마저 준다.
주5일 근무제가 전국적으로 실시된 첫 토요일인 7월3일 집밖으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 덕분에 30분에서 45분이면 충분할 거리(12.5 마일)를 1시간 반이 넘게 엉금엉금 기어오는 중에 택시기사로부터 궁합이 안 맞아 결혼을 못한 첫사랑 얘기를 포함해서 제법 많은 얘기를 들었다.
“이년아 그러려면 집 나가!” 시집 안 가겠다는 둘째 딸에게 던진 이 택시 기사의 한 마디에 그의 결혼관이 잘 요약되어 있다. 주5일 근무제 실시로 토요일 오후 극심한 교통체증 덕분에 호텔에서 오빠 집까지의 택시 요금이 1만원에서 2만원으로 뛰었지만, 대신 택시 기사와 심심찮게 많은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부시 대통령을 테러리스트라고 한 김선일씨의 피랍, 피살사건이 언론의 헤드라인을 며칠째 쉬지 않고 장식하더니 이제는 그가 속했던 가나무역의 김천호 사장이 귀국하여 김선일씨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조사를 받고 있다. 물론 출국금지 명령과 함께.
지난 며칠 동안은 이름도 예쁜 태풍 ‘민들레’가 뉴스시간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김선일(그의 사건을 세계 주요 언론에서 다룬 것이 마치 큰 영광이라도 되는 양 아나운서들은 입을 모아 인용하곤 했다), 김천호 사장, 주5일 근무제 실시, 태풍 민들레 등등 모든 언론은 마치 한 몸이라도 되는 양 어느 방송국 뉴스를 보고 듣든 어느 신문을 펼쳐 읽든 대동소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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