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약 키우는 네 가정

2004-04-2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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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의 한 한인은 얼마 전 집 앞에 젊은이가 서성거리자 누구냐고 물었다. 그 젊은이는 대학생인데 집에 갈 차비가 떨어졌으니 보태주면 나중에 갚겠다고 했다. 이 한인은 미심쩍어 연락처를 받은 뒤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젊은이의 작은아버지는 “마약쟁이니 돈을 주지 말라”며 수화기를 놓았다.
이 한인은 “가족마저 버린 마약중독자를 누가 보살피겠느냐”며 아무리 미운 자식이라도, 최후의 보루인 가정만큼은 어떻게든 보듬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자녀가 마약을 한다고 내팽개쳐버린 ‘포기 형’ 가정의 비극이다.
동부 미시건 인근에 사는 한인 부부는 마약중독 아들에게 한 목소리를 내지 않아 화를 키웠다고 했다. 대학생 아들이 마약에 절어 나락으로 빠져들어 가는데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따로 행동을 했다. 아들에게 모질게 해야 하는데 면전에서는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아들은 부모의 눈치를 보면서 교묘히 양쪽에서 돈을 타냈다.
자연히 부부싸움이 잦아지고 아들의 마약치료는 물 건너가는 듯했다. 치료센터에 보내도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아들이 비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데 참을 수 없어, 경찰에 허위 신고를 하는 고육책을 썼다. 아버지가 아들과 말하면서 일부러 얼굴을 가까이 대고 침을 튀기자 아들이 밀쳐내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폭행을 당했다고 신고한 것이다. 아들이 펄쩍 뛰자 경찰이 어머니에게 진상을 물었고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 편을 들었다. 죄 없는 아들을 경찰서에 보낸 뒤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최근 아들이 ‘미시건 팀 챌린지’란 치료센터에 들어가 갱생에 도전하고 있어 한시름 놓고 있지만 처음 문제가 불거져 나왔을 때 부모가 똑같이 단호한 자세를 보였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자중지란 형’ 가정이 문제를 키운다는 점을 일러준다.
체면이 깎일까 염려돼 자녀의 마약중독 사실을 쉬쉬하는 ‘입막음 형’ 가정도 있다. 교회 장로가 아들의 마약 문제로 골치를 썩었다. 교회에 마약 상담프로그램이 있었는데도 집안 망신시킬까봐 일절 발설하지 않고 있다가 아들을 더욱 망가뜨렸다. 전문가들이 마약치료의 가장 큰 장애물로 꼽는 것이 바로 문제를 가리고 숨기려는 심리다. 모든 채널을 통해 도움을 호소해도 치유가 어려운 게 마약중독인데, 체면을 앞세우다 보니 자녀와 가족의 심신만 멍든다.
마약 가정의 대부분은 자만의 우를 범한다. “우리 아이가 설마…” 하다가 청천벽력에 소스라치기 일쑤다. 자녀가 마약을 스트레스의 탈출구로 삼을 수 있음을 가벼이 여긴다. 비교적 풍요로운 집에서 자란 아들이 학업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다 친구의 꼬임에 빠져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마약을 살 돈이 없어 이젠 딜러로 변신했다. 결국 쇠고랑을 찬 모습을 보고서야 자신들의 안일함을 책망하는 부모도 있다.
부모들은 대부분 안전한 동네로 이사를 가면 안심하고 경계를 푼다. 하지만 마약은 부자 동네 가난한 동네를 가리지 않는다. 먹고살기 바빠 아들을 충분히 보살피지 못하자,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지역으로 이사를 갔으나 아들이 친구 집에서 마약에 접하고 중독자가 된 경우도 있다. 마약의 마수가 호시탐탐 노리는 ‘자만 형’ 가정의 슬픔이다.
포기, 자중지란, 입막음, 자만 등은 마약의 ‘원군’이다. 마약이 자녀를 좀먹고 가족을 옭아매는 데 지원사격을 한다. 자만하다 마약사용에 등한시하고, 입막음으로 중독을 심화시키며, 자중지란 탓에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치료를 포기함으로써 절망의 늪에 방치한다. 마약이 기를 펼 가정이다.
부자 동네로 이사가더라도 자만하지 않고, 일단 일이 터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자세로 곳곳에 도움을 청하며, 자중지란 대신 부모가 한 목소리를 내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한다. 마약이 움츠러들 가정이다.
“우리 아이가 마약을?” 떠올리기도 싫은 상상이지만 어느 순간 누구에게든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이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마약을 키우는 네 가정’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박 봉 현 <편집위원>bong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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