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팔루자 사태의 교훈

2004-04-0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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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0월 3일 모가디슈와 2004년 3월 31일 팔루자는 닮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슷한 현상이 비슷한 결과를 초래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부시 행정부는 훗날 사가들이 팔루자와 모가디슈가 어떻게 비슷했나가 아니라 어떻게 달랐나를 적게 해야 한다.
모가디슈 사태 이후 수개월 후 미국은 소말리아에서 철수했다. 그 몇 달 뒤 ‘1945년 이후 최악의 인종 말살’로 불리는 르완다 사태가 벌어졌다. 서방 각국이 르완다 사태에 개입하지 않은 것은 소말리아의 영향이 컸다.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을 얕잡아 본 것도 이 때부터다.
모가디슈에서부터 사우디 아라비아, 아프리카 대사관, USS 코울 등에 대한 테러가 잇달았고 마침내 9·11 사태가 터졌다. 미국의 수동적인 태도가 빈 라덴으로 하여금 회교 극렬분자에게 자신들이 승리할 수 있다고 우길 여지를 줬다. 팔루자 사태가 터지자 뉴욕타임스는 다행스럽게도 “여기 충격을 받고 갑작스레 철군해서는 안된다”고 사설을 썼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렇다고 과도한 보복을 취해서도 안된다”고 덧붙였다. 한 이라크 주둔 미군 사령관은 “폭도들을 진압하려다 사태를 악화시키느니 가만히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했다.
팔루자의 테러리스트들은 때를 만난 듯이 미군과 이에 협력하는 이라크 인들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는 탱크와 공군을 동원, 폭도를 해산하고 이에 응하지 않는 자들을 사살하고 시체를 회수한 후 살인범들의 머리에 현상금을 걸었어야 했다.
그러나 사건 발생 후 물러서지 않고 팔루자를 진압하겠다는 부시 행정부의 반응은 잘 한 일이다. 90년대의 수동적인 나쁜 습관을 깬 것은 부시 대통령의 큰 업적이나 부시 행정부조차 이를 철저히 깬 것 같지는 않다. 군대 수도 늘지 않았고 처음에는 아프가니스탄에 지상군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 이라크에도 충분한 군대가 가 있지 않다.
팔루자가 이라크에서의 승리에 대한 결의를 새롭게 하고 ‘테러와의 전쟁’의 칼을 날카롭게 가는 계기가 된다면 팔루자와 모가디슈에서 죽은 자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윌리엄 크리스톨
/위클리 스탠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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