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내치는 정치
2004-04-06 (화)
박 봉 현 <편집위원>
주말 LA인근 발보아 호수에서 수백 마리의 오리가 무리 지어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호수 한 쪽 가장자리에 다섯 마리가 한 패를 이뤄 앞서거니 뒤서거니 장난스런 몸짓을 했다. 그런데 이 중 한 마리가 대열을 이탈해 약 2미터 거리를 홀로 헤엄쳤다.
같이 있던 오리들은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제 자리에서 멀뚱멀뚱 무리를 떠난 오리를 쳐다보았다. 흥겨운 물장구는 잠시 중단됐다. 문제의 오리는 앞 만 보고 헤엄치다 그만 ‘급류’에 휘말렸다. 호수 물이 아래로 흐르도록 만든 미니 폭포에 휩싸인 것이다. 되돌아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오리는 물살에 쓸려 내려갔고 발버둥치다 몸이 뒤집히면서 돌에 머리를 부닥쳤다. 머리의 살갗이 3센티미터 가량 벗겨져 속살이 뻘겋게 드러났다. 미니 폭포 밑의 작은 개울로 굴러 떨어진 오리는 안절부절못했다. 겨우 몸을 가눠 개울 옆 바위 위로 올라갔지만 여전히 어리벙벙해 했다.
눈감고도 건너가는 제 집 문지방에 걸려 넘어진 뇌진탕 환자의 꼴이었다. 자신의 텃밭이라고 해서 마구 드러낸 오만 방자한 행동이 부른 결과였다. 이 오리의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은 “부상이 걱정스럽다”고 하겠지만 평소에 탐탁지 않게 여기던 오리들은 “까불더니 그것 봐라”하며 고소해 할 것이다. 그를 괜찮은 이웃으로 여겼던 오리들도 “이번엔 오버했다”고 할 것이다.
한국 집권 여당인 우리당 당의장이 노인들에게 이번 총선에서 투표하지 않아도 좋다는 발언을 해 일파만파를 일으킨 것도 경박함의 돌출현상이다. 표밭에 뛰어든 정치인은 초보운전자의 긴장감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을 잊은 언사였다. 노인 유권자들의 성향이 우리당의 노선과 다르면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들일 생각을 해야 하는데, 정반대로 이들을 내친 것이다.
파문이 일자, 노인들을 우습게 여긴 것이 아니라고 백배사죄했지만 노인들의 울분은 좀체 수그러들지 않는다. 가슴에 박힌 비수를 뽑아도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 법이다. 1994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총리가 말레이시아를 방문해 2차 대전 때 일본군의 만행을 참회하자, 마하티르 모하마드 총리는 50년 전에 저지른 죄에 대해 일본이 왜 계속 사죄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답변했다. 용서는 이처럼 피해자에게서 솟아나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
우리당은 분노한 노인들의 표심으로 인한 예상 밖 구도에 신경을 쓰는 눈치다. 그러나 정치권의 변화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끊임없는 부침을 낳는 것이 정치다. 하지만 사회의 한 축을 이루는 특정 계층에 대한 정치인의 폄하 발언은 건강한 사회를 좀먹는 악성 바이러스다.
우리당 당의장이 “노인들은 퇴장할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인생 극’에서 퇴장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젊어도 언젠가는 퇴장한다. 그런 이유에서 무작정 노인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젊어서 사회에 쏟은 정열과 공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노인들이 사회의 정서적 안정에 기여하는 주요 축임을 부인하지 말자는 것이다.
노인들이 대체로 보수적 성향을 띄는 것은 당연하다. 진보나 급변에 대한 지지가 곧 자신들의 축적된 삶에 대한 부정적 평가로 비쳐질 수 있는 까닭이다. 평생 이뤄 온 것들을 지키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므로 노인들을 정치적 프리즘만으로 투시해서는 안 된다. 노선이 다르다고 깔아뭉개면서 민주주의를 부르짖을 수는 없다.
한국의 노인들만 분기탱천하는 게 아니다. LA 한인노인들도 화가 잔뜩 났다. 노인을 무시하는 정치인들에 항의하기 위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LA시가 예산부족을 빌미로 노인국을 다른 국과 통폐합하는 법안을 시의회에 상정해 표결을 부치겠다고 하자 기력은 쇠해도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 없다며 시위를 벌인 것이다. 정부 살림이 쪼들리고, 고통 분담에 예외가 없다 해도 노인 모시기는 최후의 보루로 삼아야 한다.
노인은 약해졌지만 오늘을 있게 한 ‘뿌리’이고 ‘혼’이다. 약자를 무시하는 정치는 정략일 뿐이다. 약자를 내치는 사회는 병든 사회에 다름 아니다.
bongpark@korea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