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인회장 제대로 뽑으려면 후보 자질 검증할 공개토론회 갖자

2004-04-0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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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튼 공약·인신 공격 사전 차단 효과
선거관심 높이고 후보 됨됨이 알 기회
선관위 주관으로 2~3회 개최 바람직

제 27대 LA한인회장 선거가 5월 15일 실시된다. 대다수 한인들은 시큰둥한데 후보들은 임전태세가 비장하다. 한인회장은 명실상부한 대표는 아니더라도 커뮤니티 이미지를 올리고 내릴 수 있는 자리이다. 그래서 옥석을 가려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가려내느냐 하는 데 있다.

1984년 10월 21일 오후 8시(동부시간) 미주리주 캔자스시티 시청강당의 뮤직 홀. 재선을 노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민주당의 월터 먼데일 후보가 상기된 표정으로 마이크 앞에 서 있다. 1시간 30분 동안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 되는 2차 공개토론회가 시작됐다.
표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터라 두 후보는 바짝 긴장했다. 양측 선거캠프 지지 후보가 실수할까 조바심 냈다. 특히 2주일 전 경제·사회 문제를 놓고 벌인 1차 토론회에서 논리 정연한 먼데일에게 밀렸던 레이건은 전세를 만회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당시 레이건은 73세, 먼데일은 56세였다. 레이건의 나이가 당연히 이슈가 될 만했다. 하지만 먼데일은 나이를 들먹이지 않았다. 나이와 직무수행 능력을 연결했다간 자존심에 상처받은 노인 유권자들이 호통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토론자로 나온 볼티모어 선 지의 헨리 트레위트 기자가 레이건에게 질문을 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며칠을 새며 고민했는데, 레이건은 먼데일과 1차 토론회를 마친 뒤 몹시 피곤해 한 점으로 보아 고령이 국정수행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우려된다는 요지였다. 이 질문이 나오자 먼데일은 속으로 “오, 예!” 하며 쾌재를 불렀을 것이고, 레이건 측은 “오 마이 갓!” 하며 당혹해 했을 게다.
그러나 상황은 먼데일이 바라는 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난처한 질문에 대한 레이건의 답변은 틈새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이를 이번 캠페인의 이슈로 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라이벌의 젊음과 경험부족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지 않겠다.”
레이건은 아픈 질문에 미소와 유머로 이렇게 화답했다. 자신의 고령을 원숙함으로, 먼데일의 ‘젊음’을 미숙함으로 빗댔지만 누가 들어도 상투적이거나 저속하지 않았다. 긴장감으로 뒤덮였던 장내는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됐다.
내심 나이와 관련해 대통령 적격시비가 제기되길 바라던 먼데일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미리 준비한 연단위 자료 쪽으로 애써 고개를 숙였지만 터져 나오는 미소는 화면에 생생히 노출됐다. 정적의 말문을 봉쇄하고 웃기기까지 한 레이건의 승리는 불문가지였다.
토론회를 주시한 6,730만 명의 시청자들은 예민한 반응을 야기할 수 있는 나이 문제를 멋지게 되받아 친 레이건의 여유와 ‘큰 통’에 반했다. 대세는 여기서 확연히 갈렸다. 공개토론회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후보의 진면목이다. 사전에 준비된 공약발표나 선전 광고, 편집된 회견 등을 통해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됨됨이를 드러내는 게 공개토론회이다.
대통령선거는 아니지만 한인회장 선거에서도 공개토론회를 해야 한다. 얼굴은 낮이 익고 이름 석자가 귀에 익더라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의 계획과 실천방법은 무엇인지, 이대로는 알 방도가 없다.
별 관심 없는 한인회장 선거에 굳이 공개토론회 운운할 필요가 있느냐는 냉소적인 반응도 적지 않지만 어찌 됐든 밖에서는 ‘한인사회의 얼굴’ 행세를 하는 자리이다. 그러니 ‘그들만의 이벤트’로 제쳐두기엔 미덥지 못한 구석이 있다.
공개토론회는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의 현실성을 곱씹어볼 수 있는 기회이다. 듣기 좋은 미사여구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후보들은 선전문구와 인터뷰를 통해 저마다 밝고 맑은 한인사회 건설을 약속하지만 공약이 헛구호에 그친 선례를 지겹게 보아 온 한인사회이다. 공개토론회는 장밋빛 선전이 여과 없이 쏟아져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조절밸브이다. 마구 내뱉은 허튼 소리가 호된 심판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게 공개토론회이다.
경륜을 내세우는 후보가 진정 한인회를 이끌만한 경륜을 갖췄는지 아니면 단체 주변에서 닳고닳은 사람인지 그 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 1.5세의 가교역을 강조하는 후보가 커뮤니티와 주류사회를 연결하는 일을 충실히 해낼 지, 아니면 무늬만 1.5세인지도 공개토론회에서 가늠할 수 있다.
성공한 사업가로서의 이미지를 자랑하는 후보가 타운의 실질적 발전에 기여할지, 비즈니스 마인드를 무리하게 적용해 한인사회의 화합을 저해할 지 계산할 수 있다. 여성의 참신성을 자산으로 하는 후보가 정말 한인사회의 성차별을 극복하고 커뮤니티의 역량을 한껏 발휘하게 할 지, 아니면 한국에서처럼 시대 흐름에 편승해 인기몰이를 하려는지 따져볼 수 있다.
관심이 온통 ‘다른 데’ 가 있는 후보를 솎아내는 데도 공개토론회가 제격이다. 한인회장 자리를 본국정계로의 징검다리 정도로 여기는 후보들은 이들의 선전문구나 공약만으로는 가려낼 수 없다. 공개석상에서 꼬치꼬치 캐묻고 속셈을 들추어내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공약에 대해 얼마만한 전문지식을 갖고 있으며 구체적인 실현 방안이 무엇인지 따져 무자격자의 얼굴을 화끈 달아오르게 하는 것도 공개토론회이다.
한인회장을 열심히 한 뒤에 그 ‘치적’을 바탕으로 정계에 뛰어드는 것을 말릴 이유는 없다. 그러나 과거 한인회장 출신들이 이렇다할 업적 없이 인맥만 믿고 본국정계에 진출했다가 별 볼일 없는 신세가 된 일은 타산지석이다.
한인회를 민주적으로 꾸려갈 소양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수년 전 한인회 이사회에서 주요 안건을 심의하고 표결하는 자리에 나온 일부 이사들이 딴 세상 사람처럼 현안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해프닝이 있었다. 건설적인 논쟁과 합리적인 결정보다는 ‘자기 사람’을 거수기로 동원한 회장의 ‘원죄’이다. 공개토론회에서 이러한 독선적 유형을 분류할 수 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공명정대한 선거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다. 공개토론회는 깨끗한 선거풍토 조성에 기여한다. 선거관리위원회가 공개토론회를 추진할 명분과 실리는 여기에 있다.
선거일까지 아직 한 달이 더 남았다. 마음만 먹으면 두세 차례는 할 수 있다. 한인들의 관심은 고조될 것이고, 선관위는 한인회장 선거를 본궤도에 올린 산파로 평가될 것이다.

박 봉 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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