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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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 그 질긴 생명력

2004-01-2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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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넘긴 요즘, 한국의 정치판은 석달 앞으로 다가온 국회의원 선거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4당 각축이 예상을 내다봤지만 현재 제1당인 한나라당과 노무현씨가 만든 열린 우리당과 2파전이 될 것이 확실하다. 김대중씨의 적자격인 민주당이 호남에서 선전한다 해도 전국 지지도는 열린당에 쳐지기 시작했다. 군소 정당으로 전락한 자민련이 재기를 향해 몸부림치고 있지만 텃밭인 충청지역에서도 역부족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40여년간 한국 정치를 요리해 온 3김씨,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가 총선을 앞두고 세론의 주목을 다시 받고 있음은 한국 정치의 역설이자 불행이다. 어떤 때는 동맹군으로, 또 어떤 때는 숙원의 정적으로 제각기 애증의 역사를 기록해 온 이들 3김씨가 2004년 새해 들어서도 이 나라 정치의 주변을 서성대고 있음은, 그들의 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뜻 있는 이들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불유쾌한 모습이기도 한 때문이다.
누구는 물었다. 3김씨 가운데 최후 승자는 누굴까? 기록으론 정상을 차지한 YS와 DJ를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순간 두 김씨가 초라한 퇴역으로 밀려난 가운데 정치의 한 구석이나마 주목받는 현역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JP가 최후 승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정계의 ‘물갈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JP는 이번에도 총선 출마를 선언하고 한국 정치사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10선 국회의원, 그 누구도 못한 첫 헌정기록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그는 ‘온실 속에서 자란 잡초’같은 근성의 소유자다. 두 김씨처럼 험난한 정치의 길을 걷지 않았지만 끈질긴 적응력으로 살아 남았다는 점에선 밟으면 눕고 세월이 흐르면 다시 일어서는 잡초의 근성을 지녔다. 정상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행복지수에서도 JP는 YS나 DJ보다 앞선 듯하다. 두 사람 모두 정치자금에서 자유롭지 못한 때문이다.
아마도 YS나 DJ는 생전 정치자금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 YS는 요즘 안기부 선거자금의 족쇄에 물려 자칫 법정에 서야할 처지다. 따지고 보면 YS가 이 지경에 이른 이면에는 DJ의 ‘YS 죽이기’가 작용한 셈이다. 98년 집권에 성공한 DJ 정권은 YS 주변의 정치자금 루트를 내사하기 시작해 ‘안기부의 정치자금 조성’이라는 대형 비리를 건져 올렸다.
‘안풍’으로 불린 이 사건의 내막은 지금 진행 중인 재판에서 드러나겠지만 DJ 정권은 그 돈이 안기부 예산이라고 몰아쳤다. 수백억원의 ‘국가 예산을 당시 집권당인 신한국당의 총선 자금으로 유용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최근 밝혀진 바로는 그 돈은 YS가 대통령 선거 때 쓰고 남은 돈을 안기부 계좌에 넣었다가 총선에 투입한 세탁된 돈이라는 게 정설이다.
지금 YS는 다시 한번 DJ에 진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YS 집권 말기에 실시된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측은 DJ의 불법 정치자금을 조사하도록 YS에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YS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대선을 앞두고 검찰이 DJ를 건드릴 경우 호남에서 민란이 일어난다고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이회창 쪽 요구를 묵살, DJ에 면죄부를 주고 그 결과 DJ의 대선 승리를 후원한 꼴이 됐다. 바로 이 점에서 YS의 DJ에 대한 배신감은 처절하고 어떤 형태로든 ‘DJ와 노무현 혼내기’를 골똘히 생각 중이 란다.
반면 DJ는 어떤가. 정상의 자리를 내려온 이후 3아들과 측근들의 불법 정치자금과 대북 송금 논란에 시달려 발뻗고 자지 못한다는 소식이다. 대북 송금 특검 조사에 따른 재판이 진행되면서 DJ 통치 5년간의 불법 자금 내막이 하나 둘 공개될 것이고 그 결과 DJ가 어떤 수모를 당할지도 예측 불허다.
뿐더러 야당에선 총선 때 호남표를 의식해 DJ 문제는 일단 덮어두고 있지만 총선 막바지, 그리고 다음 국회에서 본격적인 ‘DJ 죽이기’에 나설 것이라고 한 야당 중진은 귀띔했다. 이래저래 DJ를 향한 칼날이 도처에서 춤을 출 게 분명하다. 그러니 80순을 넘긴 노인의 심사가 편할 리 있겠는가.
한데 표면상으로는 DJ의 주가가 요즘 제법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민주당은 물론이고 노무현 당도 DJ에 ‘러브 콜’을 던지고 있다. 호남표를 의식한 선거전략이 분명하지만 DJ 자신은 매우 흡족한 모양이다. “나는 정치를 떠났다”며 짐짓 초연함을 과시했지만 그의 머리 속은 총선 계산에 분주할 것이다. 하나는 민주당의 석권을 후원하는 일이다.
호남은 싹쓸이하고 전국의 호남표도 뭉쳐 민주당을 제1당 자리에 올려놓는 전략이다. 두번째 시나리오는 첫 전략이 불발했을 때 작동할 듯하다. 총선 후 노무현 당과 민주당과의 합종연횡을 막후에서 도와 정치판에 지각변동을 가져오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DJ와 노무현씨는 정치적 ‘러브 샷’의 잔을 들어올리며 포옹할 것이다.
지난 신정 때는 1,500여명의 하객이 새로 건축한 DJ의 동교동 자택으로 몰려들었다. 이젠 걷기조차 힘든 지경에 이른 건강에도 불구하고 DJ의 정치적 행운은 계속될 수 있을까. 반세기 가까이 정치를 주물러 온 3김 시대의 종언은 아직도 요원한가. 그 열쇠는 유권자 손에 달려있다.

안영모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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