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화답의 끝자락

2003-12-3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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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랑 남은 한 장의 캘린더를 떼 내는 심정은 착잡하다. 그 착잡함의 심저에는 지난날에 대한 서글픔과 앞날에 대한 회의가 짙게 깔려 있다. 아니 그 착잡함은 이내 분노로 돌변한다. 지난 365일, 우리가 걸어온 길은 혼돈과 투쟁과 정체의 시간들이었다. 남들은 구보로 뛰는 데 우리는 뒷걸음질 친데 대한 뼈아픈 회한 때문이다. 하지만 하늘을 보고 주먹질하고 어딘가를 향해 고함을 친들 무슨 소용이 있을 손가. 이내 그 분노는 실의와 무기력으로 주저앉는다.

나는 올 정초 이 칼럼에서 하나의 화두를 던졌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새 지도자를 맞아 새로운 국가 발전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반목과 분란과 아귀다툼의 대결로 가고 있는가. 이제 그 화두에 대해 화답할 시간을 맞았다. 불행하게도 그 화답은 어둡고 침울하다. 나라 곳곳이 갈기갈기 찢어진 한 해-- 지도자는 믿음을 잃고, 정치판은 대결과 반목으로 치닫고, 경제는 죽을 쓰고, 제 몫 챙기려는 패거리 아귀다툼이 일상화하고, 부정부패의 고름은 골수에 닫고, 새파란 젊음들이 파산의 질곡 속에서 거리를 배회하고, 죄 없는 어린 자식들을 한강에 내 던지는 가정 붕괴-사회 파탄의 병고가 뼈까지 파고 든 국가 위기의 한 해였다.

왜 이리 됐는가. 그 책임의 중심에 노무현 대통령이 있음을 본다. 젊음과 패기와 ‘안 가진 자’와 ‘덜 오염된 자’와 ‘가식을 거부한 자’와 ‘권위 대신 소탈함을 취한 자’로 비쳤기에 그는 국민의 선택을 받고 권력의 좌에 올랐다. 그의 특징적 장점이 그러하기에 그를 지지하지 않은 국민 절반의 반대자들도 조용히 거동을 지켜보며 기다려왔던 것이다. 한데 기대와, 희망과, 그렇지는 않더라도 암묵적 지지를 보낸 많은 이들은 이 한 해가 저무는 이제 쓰디쓴 맛을 짓씹고 있어야 했다.


젊음과 패기는 끝없는 정치실험과 무모한 개혁과 돌이킬 수 없는 시행착오로 점철됐다. ‘우왕좌왕의 정권’ 이라는 모욕적 평가는 필연인 셈이다. ‘안 가졌다’는 그와 그 주변이 과연 청렴을 몸으로 실행한 백로였던가. 오염도는 그 자신의 입으로 고백했듯이 ‘오십보 백보의 차이’가 아니었던가. 아니 ‘오늘의 노무현’을 만든 측근 공신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차고 당선 사례금이 문제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초록은 동색이 아니었던가. 누굴 향해 돌팔매를 던질 수 있단 말인가.

노무현씨는 자신의 업적으로 ‘탈 권위’를 자랑했다. 목에 힘주지 않는 소박한 지도력이 자신의 통치철학이라고 강조했다. 전임자들과 비교해서 그런 측면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문제는 갖추어야할 지도자로서의 덕목으로부터 이탈한 것을 ‘탈 권위’로 착각했다는 점이다. 그는 대통령이 지켜야 할 천금같은 말을 가볍게 내뱉곤 했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지도자로서 존경받는다는 사실을 지나쳤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갖는 심대성을 알지 못했다. 한-미 관계가 삐꺽대던 취임 초, 그는 못할 말을 했다. 「남북관계만 잘 되면 모든 건 깽판 쳐도 된다.」말이 씨앗 된다고 했던가.

아닌게 아니라 모든 게 ‘깽판’이 됐다. 상생정치, 노사화합, 지역성 극복, 부패척결, ‘경제 재도약’--모든 게 ‘깽판’이 됐다. 지난 1년 동안 노무현씨가 던진 말, 말들은 대통령으로서 지녀할 ‘권위’를 깡그리 붕괴시켰다. ‘탈 권위’는 ‘탈 권위주의’여야 한다. 수 조원의 재산 피해를 몰아온 초특급 태풍이 엄습한 판에 넥타이 푼 평상복 차림으로 오페라를 감상하는 게 ‘탈 권위’가 아니다. 헬멧 쓰고 긴 부츠 신고 비바람 몰아치는 수해 현장에 나타나 국민들의 애환을 어루만지는 게 진짜 ‘탈 권위’다.

「대통령 못 해 먹겠다」는 말은 또 어떤 씨앗을 뿌렸을까. ‘엄살을 좀 떨었다’는 말로 자신의 가벼운 말을 한참 뒤 변명하긴 했지만 ‘재 신임 국민투표’라는 폭탄 선언으로 이미 대지 위에 또 다른 씨앗을 뿌린 건 아닌지. 요 근래 던진 ‘시민 혁명’ 운운 한 말은 그 씨앗의 작은 움틈인가. 그렇다면 자신의 뿌리가 견고하게 내릴 대지의 발판을 ‘혁명적 수단’을 통해 다져보자는 의도일까. 이대로는 대통령을 못 해 먹겠으니, 정치판을 뒤엎어 다음 총선에선 나를 반석 위에 올려놓아 달라는 호소 아닌 압력인가.

얼마 전 나는 고름이 뼈 속 깊이 파고 든 지금의 이 더러운 정치판은 갈아엎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나는 결코 ‘노무현 식 혁명논리’를 제의한 게 아니다. 자기와 자기편은 그 혁명 논리 뒤에 숨고 ‘오십보 더 나쁜 길로 간 자’만 몰아내면 만사 오케이라는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백보 아닌 오십보의 잘못된 길을 걸은 자신도 마땅히 책임을 져야한다는 게 나의 논리다. 그런고로 나는 이 추악한 정치판을 갈아엎음에 있어 ‘차떼기’로 기업 돈을 훑여간 한나라당의 뿌리가 우지끈 뽑혀 나가든, 지고한 대통령 권좌에 앉아 있는 노무현씨의 위상에 어떤 변화가 오든, 짚을 것은 짚고 따질 것은 따지고 벌할 것은 가차없이 벌하는 형평의 ‘갈아엎음’을 주창했던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나는 ‘노사모’라는 지지 단체에 동원령을 내리는 듯한 노무현 식 ‘시민 혁명’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국가의 장래와 민족의 운명을 고민하는 지도자, 달콤한 말로 코드를 맞추려는 주변을 내치고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반대쪽에 귀를 기울이고, 말 한마디를 천금처럼 소중히 여기는 신뢰받는 지도자가 이끄는 참다운 시민 혁명을 갈망할 뿐이다. 하지만 나의 이 작은 소망은 2003년의 마지막 달력과 함께 과거의 시간 속으로 매몰돼 가고 있음은 나만의 서글픔이 아닐 것이다.

안영모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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