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노 대통령의 이상한 논리

2003-12-1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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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모 - 언론인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야심과 야당의 저항이 어떻든, 저 더럽고 구역질나는 권력형 비리와 검은 정치자금의 사슬을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끊어내야 한다. 나라가 뒤숭숭하고, 경제가 얼마간 뒷걸음질친다 해도, 입만 벙긋하면 애국애족하면서 음험한 막후에서 돈 다발을 챙겨 이 곳간 저 곳간에 은밀히 숨겨 온 저 정상배들의 덜미를 가차없이 낚아채야 한다.

나는 지금 무슨 혁명논리를 전개하려는 게 아니다. 정치판을 뒤엎어 얄궂은 이념으로 무장한 극좌파에 나라를 넘겨주자 거나, 무늬는 민족주의로 포장하고 속내는 딴판인 반미-친북파들의 세상이 된들 알 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분명히 말하건대 현 집권 세력이든, 이들에 저항하는 비집권 세력이든, 그 배속이 검은 돈 다발로 가득 찬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솎아내고, 우리가 절대 가치로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존중하는 장래가 촉망되는 깨끗한 얼굴들로 새 판을 짜자는 것이다.


나는 지난 칼럼에서 불법 선거자금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거취가 달렸건 말건, 야당이 뿌리 채 뽑히건 말건, 밭을 갈아엎을 수밖에 다른 길이 없음을 주장했다. 그리고 두 가지 방법론을 제시했다. 대통령 쪽은 특별검사가, 야당 쪽은 비록 편파수사 소리를 들을지언정 검찰이 파헤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나의 당초 예언대로 노 대통령이 자신의 권한을 동원해 특별검사를 거부했지만 국회가 다시 못을 쳐 꼼짝없이 특검을 받게 된 상태고, 검찰의 한나라당 대선 자금 수사도 신명나게 돌아가고 있음은 일단 잘된 일이다.

이 두 갈래 수사로 드러날 결과에 대해 직접 범법자들이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함은 물론이려니와 그들 뒤에 몸을 감춘 배후 세력들도 응징을 받아야함 또한 당연하다. 검은 돈을 전달한 조무래기 심부름꾼이나 잡아 가두고, 그 배후에 버티고 있는 진짜 거물도둑을 그냥 지나친다면 말짱 정치 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왕지사 여기까지 왔다면, 다시 말해서 ‘돈 배’로 빵빵해진 그 기름진 복부에 칼을 대기로 했다면, 철저하게 그리고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썩은 고름을 뽑아내고 득실거리는 균에 오염된 장기, 그 게 큰놈이든 작은놈이든 몽땅 잘라내자는 게 나의 주장이다.

한데, 엊그제 노무현 대통령은 4당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상한 소리를 던졌다. 만약 (검찰수사에서) 나의 불법 선거자금이 한나라당의 ‘십분의 일’ 이상 드러나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속내를 헤아리느라 정치권은 이것저것 짚어보고들 있는 모양이지만 어렵게 생각할 게 뭐가 있겠는가. ‘작은 암 덩어리’는 봐 달라는 소리 아닌가. 수하의 법무장관, 미모와 담력까지 갖춘 여성 법무장관 보고대로라면 한나라당이 10개를 해 먹었다면, 자신(노 캠프)은 그 10분의1보다 적은 액수만 나오게 돼 있으므로 배수진을 친 것은 아닐까. 어차피 이쪽 저쪽 다 해먹은 판에 그래도 덜 먹은 쪽이 욕을 덜 먹지 않겠느냐는 계산을 한 건 아닌지.

아닌 게 아니라 지금 한국민들은 검찰이 들춰낸 한나라당의 불법 선거자금 진상을 전해 듣고 분노에 떨고 있다. 액수도 이만 저만이 아닌데다 모금 수법이 범죄조직인 마피아 뺨칠 정도라는 데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돈 상자를 가득 실은 트럭을 몰고 갔다니 이 게 도대체 가당한 짓인가. 입이 열 개인들 변명의 여지가 없는 불법이요 파렴치가 아닌가. 그런고로 그 짓거리에 관계된 한나라당의 책임자들은 모두 쇠고랑을 차야 마땅하다는데 누가 이의를 제기할 건가.

아마도 노무현 캠프 쪽은 그 점을 노렸을 것이다. 하면, 그 쪽은 백로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야당 쪽이 씨근대며 주장하는 검찰의 편파수사는 일단 뒤로 제쳐놓자. 검찰이 허튼 수작을 할 때면 측근비리 특검 말고 노무현 캠프 선거자금 특검을 실시할 공산이 큰 만큼 검찰 손가락질은 일단 뒤로 미루자. 문제는 지금 검찰이 찔끔찔끔 흘리는 내용만으로도 사태는 보통 심각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노무현 후보를 청와대로 보낸 공신중 공신인 최측근 5명이 비리로 쇠고랑을 차고 또 민주당이 선거 때 챙겨간 돈도 만만한 액수가 아니라는 혐의가 짙다. 노무현식 계산법대로 야당의 10분의1이 채 못된다 치더라도, 자기들은 그냥 넘어갈 것으로 기대한다면 그건 대 착오다.

사실 더 큰 문제가 노무현 대통령 쪽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성의 잣대다. 국가의 최고 통치자라는 그의 입지는 비록 야당보다는 덜 돈을 긁어갔다 하더라도 책임은 몇 배 더 혹독할 수밖에 없다. 액수의 과다가 면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뿐더러 노 대통령에게 던져진 의혹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천신만고 끝에 정상을 거머쥔 직후 ‘당선 사례비’로 상상할 수 없는 거액을 받았다는 야당의 의혹 제기가 그것이다.

이미 검찰이 밝혀낸 SK의 11억원이 노 대통령 아들 결혼 축의금조로 건넨 당선 사례금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지 않았던가. 부산지역 상공인들이 300억을 건넸다는 의혹은 또 무언가. 만약 이 가운데 어느 한 케이스라도 사실로 드러날 경우 설혹 야당이 긁어모은 불법 정치자금의 10분의1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책임의 두께는 그 몇 백배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통치자의 윤리성은 그처럼 엄격한 법이다. ‘대통령 못해먹겠다’느니, ‘여차하면 물러나겠다’는 그의 잦은 발설이 말의 씨앗이 되는 건 아닌 지, 신중치 못한 대통령의 말이 나라를 들썩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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