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웅변의 한계

2003-11-1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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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자유와 민주주의 창달에 미국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는 2000년 대선에서 큰 이슈였다. 후보 중 하나는 윌슨 스타일의 이상주의자로 미국은 군사력을 사용해서라도 세계 민주화에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쪽은 이런 허황된 생각을 조롱하면서 미국인의 피와 재산은 오직 인도주의 사업이나 국익을 지키기 위해서만 사용돼야 한다고 맞섰다. 그러나 선거 후 이 현실주의자는 이상주의자로 돌변했다. 민주주의란 묘한 것이다.

자유를 위한 전진 정책을 펴겠다는 부시의 연설은 웅변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그렇다. 그러나 그 말이 진심이라고 믿을 수 있다면 더 그랬을 것이다. 말의 진실성을 시험하는 방법의 하나는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했는가에 있다. 그러나 부시 연설에는 이 점이 빠져 있다. 진실성 여부는 말한 사람의 과거 행적을 봐도 알 수 있다. 부시는 이라크 전쟁이 미국 이익을 위해서라고 주장하다 이제 와서 갑자기 이유를 바꾸고 있다.

2000년 부시는 클린턴 행정부가 지나치게 외국 문제에 개입한다고 비판했다. 민주주의 하에서 선거로 뽑힌 공직자는 유세 중 약속한 정책을 실천하는 게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바꾸는 것은 훌륭한 일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와 정직함, 열린 마음 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부시는 미국의 역할에 대한 마음을 바꾼 것일까.


진정으로 마음을 바꾼 경우에는 그렇게 한 이유가 설명돼야 한다. 부시는 지난 60년간 서방 각국은 중동의 자유 부재를 눈감아 왔다고 주장했다. 이는 아버지 부시 정책에 대한 비판이지만 이라크 사태가 꼬이기 전 불과 몇 개월 전까지 지녀온 자신의 생각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진정으로 마음을 고쳐 먹은 사람이라면 좀 겸손할 필요가 있다. 최근까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이번 생각이 100% 옳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러나 부시는 미국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다. 불과 얼마 전 그 반대가 옳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가 불과 5분전에 말한 것과 정반대 주장을 해도 여전히 그 뒤를 따르는 부시 지지자들의 모습은 1930년대 코민테른 지지자들을 보는 듯하다.

마이클 킨즐리/ 워싱턴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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