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검은 돈’ 중독자들

2003-11-04 (화)
크게 작게
얼마 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여론조사가 실시됐다. 그 가운데 매우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얼마를 벌면 부자로 보느냐?’는 물음에 아이들 답변이 기절초풍할 지경이다. ‘백억 이요!’라고 아주 자신 있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백억 원이라--글세, 그게 얼마나 많은 돈일까. 사과 상자에 차곡차곡 넣으면 1억원이 들어간다니 상자 백개를 쌓은 돈이다. 그래도 실감이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민초들이 어느 세월에 그런 돈더미를 본적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자신의 봉급을 기준으로 따져 보면 어렴풋이 감이 올 것이다. 연봉 5천만원(약 5만달러)을 받는 봉급자라면 2백년 동안 꼬박 모아야 하는 돈이다.

이제 겨우 열살 전후의 어린아이들이 이 어마어마한 돈을 부자의 조건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이들 뇌리에는 돈은 많을수록 좋고, 돈을 벌려면 수단 방법을 가릴 게 없다는 잠재의식이 깔려있다. 왜 이 지경이 됐느냐고 묻는 것은 그야말로 우문이다. TV를 틀었다하면 ‘억 억’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그것도 탈법과 투기와 요행이 깔린 ‘검은 돈’의 거래들이다. 관리들에게 천만원을 건네면 1억원의 이문이 돌아오고, 강남 재건축 아파트에 투기하면 한 달 새 몇 억원을 움켜쥐는 판이니 그런 짓 못하는 자가 바보요 등신이라, 어른이고 아이고 ‘대박의 꿈’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해먹는 관리, 매수하는 사업가, 투기하는 복부인, 돈 갈취 사기꾼 등등 크고 작은 범법자들 중 재수 없어 걸리면 쇠고랑차고 감옥에 갔다가 몇 달 살고 나오면 그만이다. 내 가족 먹여 살릴 건 충분히 챙긴 탓이다. 그 밖의 많은 범법자들은 용케도 법망을 빠져나가 호화 빌라에서 외제차 타고 떵떵거리며 산다. 한데 이자들보다 더 나쁜 ‘큰 도둑’이 한국에는 존재한다.
입을 열었다하면 ‘애국애족’과 정의와 민주와 불의와의 투쟁을 외치는 자들이다. 바로 한국의 정치인들이다. 여당 야당을 가릴 게 뭐 있는가. 개혁 보수를 나눌 건더기나 있는가. 민주 세력? 참신한 신진?--모두 부질없는 수작이다. 정권의 핵심들, 권력의 단물을 빠는 집권 세력들, 그 권력의 영원한 추종자임을 자임하는 고위관리들--바로 말하자면 아주 일부를 빼고는 모두가 ‘도둑X들’이다.


한번 따져 보자. 노무현 정권의 개혁파 실세가 기업으로부터 11억 원을 받아 챙긴 게 들통났다. 하필이면 노 대통령 아들 장가가는 날 받아 넣은 데다 끝자리 1억은 뭐람! 그러니 큰 것은 ‘결혼 축의금’, 작은 것은 수고비 아니냐고 민초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게 아닌가. 또 얼마 전엔 대통령 당번격인 청와대 행정실장이란 자가 지방 업자들하고 유흥업소에서 질펀하게 마시고 사례비도 챙겼다는 혐의로 쇠고랑을 찼으니 노 대통령 체면은 구길 대로 구겨진 셈이다. 11억 건에 대해선 노 대통령 자신이 ‘눈앞이 캄캄했다’며 신임투표하자고 나선 바로 그 사건이 아닌가. 거기서 끝났다면 돈 받아 챙긴 자만 쇠고랑 차면 될 것이다.

하지만 기막힌 폭로가 터져 나와 사태는 심상치 않다. 대선 때, 노무현 후보 최측근을 지낸 사람의 말이다. 대선에서 승리하자 노무현 당선자 캠프는 돈벼락을 맞았다.--이 때 안 해 먹고 언제 해먹느냐--이러면서 제 정신들이 아니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더럽고 구역질나고 분통터지는 일 아닌가. 돼지 저금통으로 깨끗한 선거 개혁을 실천했다는 노무현 캠프, 아니 낡은 정치 유산을 청산하고 참신한 정치 혁명을 추진하겠다고 기염을 토한 노무현 대통령--그 주변을 둘러 싼 이런 저런 지저분한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있으니 정권 신뢰도는 땅에 떨어질 밖에 없다.

문제는 더러운 돈 거래가 집권 세력의 전유물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노무현 정권을 질타해 온 야당의 속살도 검기는 매일반이었다. 아니 현재 들어 난 대로라면 검은 돈 뭉치는 더 크다. 한 대기업으로부터 백억원을 받아 선거자금으로 썼다는 것이다. 남의 허물을 탓하는 자가 제 눈에 대들보를 끼고 있었다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개인 부정이 아니라 당의 선거자금이었다고 변명을 늘어놓고 있지만 일벌백계, 단단히 버릇을 고쳐주어야 할 사건이다.

지난 대선 때 한나라당에 돈이 몰렸던 이유와, 대선 후 노무현 캠프로 ‘돈 벼락’이 떨어진 이유에 대해 한 정치인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회창 후보가 당선되리라는 것은 기정 사실이었다. 대기업들이 앞다투어 선거자금을 싸들고 줄을 섰다. 한데 선거결과는 딴판으로 나타났다. 기업들은 ‘큰일났다’며 노무현 캠프 쪽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노 당선자 측근은 1순위, 무슨 특보, 무슨 보좌관하고 선거 때 찍은 명함 소유자들에게도 돈 다발을 들고 밀려들었다. 회사 장래를 건 보험 성격의 베팅이었다. 선거 때 노 후보 주변에 서성댄 많은 이름 없는 자들도 주머니를 채웠다.

이렇게들 해 먹고도 막상 걸려들면 열에 열 모두 ‘일전 한푼 받은 적 없다’다. 얼굴조차 모른다는 철면피도 있다. 수사가 조여 오면 ‘정치자금’이라는 방패 뒤로 몸을 숨긴다. 야당은 정권이 탄압한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막상 검찰은 칼을 뽑아 들지만 권력 핵심 앞에선 자꾸만 작아지고 야당 두어 명에 여당 하나 정도 오라로 묶고는 ‘엄정 수사 끝’하고 손을 턴다.

그러니 이제 백성들은 대통령이 뭐라 하든, 야당이 아우성을 치든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속으로 뇌까린다. 어허, 말짱 도둑X들 아닝개벼-- 민초들 마음은 더없이 우울하고 조국의 장래는 더욱 더 암울하다.

(안영모)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