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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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로 점화된 정치공방

2003-11-0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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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A,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한 자동차 등록세 인상을 지지했으며 지금도 데이비스의 조치가 번복돼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이번 산불은 비상사태를 극복하기 의한 재원확보의 필요성을 입증했다.

주민 B, 자동차세 인상에 반대해 새 주지사를 선택했지만 예기치 않은 재앙을 맞았으니 슈워제네거가 자동차세 인상철회 공약을 뒤집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

주민 C, 자동차세 인상에 반대하지만 화재 피해의 정도에 따라 생각을 달리할 수 있다. 사회기간 시설이 파괴될 경우엔 세금을 거둬 고치는데 동의하지만 이번 산불피해는 그런 수준은 아니다. 주민 D, 자동차세 대폭 인상에 반대해 소환에 찬성했고 슈워제네거에 한 표를 던졌다. 산불이 났지만 지금도 당초 입장에 변함이 없다.


자동차세 인상과 주민들의 공방은 바로 42억달러에 달하는 세수의 대부분이 지역 경찰국과 소방국 예산에 투입되기 때문이다. 자동차세 인상을 철회하면 가뜩이나 어려운 정부 살림살이에 소방국과 경찰국이 된서리를 맞게 될 것이 자명하고, 또 다른 재앙이 발생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우려가 논쟁에 불을 붙인 것이다. 이는 저잣거리의 한담이 아니라 정치인, 언론 등도 저마다 다른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순식간에 달아오른 핫 이슈다.

증세 지지자들은 올해 100억달러에 달하는 정부 재정적자 규모를 거론하며 자동차세 인상조치를 뒤엎으려 해선 안 된다고 펄쩍 뛴다. 만일 여기에 손을 댔다간 향후 대재앙에 속수무책이란 논리다. 또 현재 소방관 수가 인구비율로 볼 때 지난 20년간 최저임을 강조한다. 게다가 올해 이미 삼림 및 화재진압 예산이 5,000만달러나 삭감돼 적어도 이 부문만큼은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맬 수 없는 지경임을 부각시킨다.

자동차세 인상 보호에 머물지 않고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담배세, 판매세, 부유세를 올려 세수를 마련하자며 공격적으로 나오는 세력도 있다. 이들은 이번 화재를 다양한 증세의 모멘텀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 그냥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수치까지 제시한다. 판매세를 달러 당 0.5센트 올리면 연간 24억달러가 확보되고, 연소득 30만달러 이상의 부부 가정의 세율을 현행 9.3%에서 10.3%로 올리면 13억달러를 가뿐하게 추가할 수 있고 담배세를 갑 당 40센트 인상하면 6,750만달러의 ‘공돈’이 가뿐히 굴러들어 온다는 계산이다.

세금과 관련한 찬반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특히 기록적인 피해를 입힌 이번 산불을 몸소 겪은 주민들로서는 세금 인상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인지상정일 지 모른다. 하지만 어수선할수록 더 냉정해져야 한다. 슈워제네거가 취임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가 새 정부의 청사진을 밝힌 것도 아니다. 세금인상 반대, 즉 ‘자동차세 인상철회’ 공약은 슈워제네거를 새크라멘토에 입성시킨 주무기였다.

물론 주정부가 천문학적 규모의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고 해도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소방관과 경관을 줄여선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세금 인상이 능사는 아니다. 정부 예산의 씀씀이를 면밀히 점검해 낭비요소를 과감히 잘라내는 게 우선이다. 공직 사회에는 비효율적인 부분이 적지 않다. 이를 잘 찾아보면 예산 누수현상을 상당부분 막을 수 있다. 고액연봉을 받으면서도 타성에 젖은 공무원이 적지 않을 것이다.

새 주지사가 취임 후 일정기간 시정을 펼쳐본 뒤 아무리 쥐어짜도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 없다면 그 다음에 증세를 논의해도 늦지 않다. 돈도 돈이지만 정치인이 공약을 상황논리에 맞춰 손바닥 뒤집듯 하면 안 된다. 도로가 유실되고 교각이 붕괴하고 항만이 파괴되며 전기, 수도시설이 망가지면 또 다르지만 말이다.

산불 피해액이 20억달러 정도로 추산되지만 1조4,000억달러인 캘리포니아 경제규모로 보면 그 파급효과는 그다지 우려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게 경제학자들의 진단이다. 산불이 슈워제네거의 ‘자동차세 인상철회’ 공약을 번복할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재산 피해는 크지만 서서히 회복될 수 있고, 생태계 파괴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정 ‘번복’ 하더라도 모든 카드를 다 써 본 연후라야 한다. 주위에서 지도자로 하여금 신뢰를 헌신짝처럼 버리도록 종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약삭빠른 정치인들이 이번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워싱턴 DC에서는 부시 대통령이 제안한 ‘건강한 삼림안’이 하원을 통과하고 상원에 회부됐다. 이는 한마디로 벌목회사의 운신의 폭을 넓혀주는 법안이다. 지지자들은 나무가 너무 빽빽하면 이번처럼 대형 산불이 날 수 있으므로 적당히 중간 중간을 잘라주어야 한다며 치고 나온다.

하지만 이 법안은 불이 나도 인명 및 재산 피해 걱정을 별로 할 필요가 없는 심산유곡에서 고목들을 상업용으로 자르도록 허용하고 있다. 수입의 일정부분을 삼림보호에 할당하거나 환경보호를 위한 규제장치를 구비해야 한다는 원칙에 소홀해 국유림 훼손이 걱정되는 데도 호기를 맞은 듯 밀어붙이고 있다. 자연보호를 위해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하지만 벌목회사들과는 ‘한 집 건너 이웃’일 테니 위원들이 로비에 얼마나 견뎌낼 지 의문이다.

산불 불똥이 ‘테러와의 전쟁’에도 옮겨 붙을 태세다. 아직 일각에서 조심스레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얘기지만 혹시 이번 동시다발 산불이 테러범의 소행이 아니냐는 것이다. 알카에다의 테러는 아니더라도 국내 동조세력이 자행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다. 테러와의 전쟁에 고삐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해석이라 해도 가뜩이나 흉흉한 민심을 악화시킬까 염려된다. 또한 정신나간 방화범과 조직적인 알카에다의 파괴행위를 ‘테러’라는 동일한 카테고리에 넣다보면 테러와의 전쟁 와중에 심심지 않게 빚어지는 민권침해에 무신경해질 수도 있다.

건전한 논쟁과 건설적 대안은 필요하다. 그러나 정치적 목적이나 로비단체와의 이권을 바탕에 깔고 산불을 이용하려 든다면 곤경에 빠진 캘리포니아 경제에 주름살을 하나 더 긋는 격이다. 화마에 집과 가족을 잃고 참담해 하는 주민들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더 안겨주는 것이다.

박봉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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