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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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장난

2003-10-2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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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장난

박중돈/법정 통역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별생각 없이 자주 쓰는 말 중에 죽인다고 하는 고약한 표현이 있다. 아이들도 서로 놀다가 다툼이 생기면 가만있지 않겠다 혼내주겠다고 위협하는 말로 죽인다는 표현을 쓰는 것이 우리에게는 아주 보편화 되어있다.
말하고자 하는 뜻을 강조하려는 표현이 이렇게 발전되지 않았나 싶다. 죽음이라는 것이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에 죽음에 비유한다는 것은 곧 그 최상급이기 때문이리라. 너 이러면 죽인다 했을 적에 너 이러면 내가 참을 수 없다는 뜻으로 가만있지 않겠다 정도의 뜻일 것이다. 이럴 경우에 진짜로 나를 죽이려 한다고 믿는 한인은 물론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 ‘죽인다’는 말이 형사사건의 재판에 관련되었을 때에는 영문번역 과정에서 때로는 심각한 결과로 발전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며칠 전 돈 문제로 싸움이 난 동료가 주먹질을 했다 해서 그 중 한 사람이 경찰에 신고한 일이 있었다. 경찰에 가서 그가 폭행을 한 끝에 너 돈을 갚지 않으면 죽인다며 위협했다고 했다.
우리 상식으로는 화가 나면 으레 나오는 말로 그냥 보아 넘기지 않겠다는 뜻일 터인데 경찰에 신고하러 간 이 친구는 이 말을 영어 직역 표현으로 I will kill you!라 했다고 신고한 것이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고발인이 말하는 대로 경찰조서를 꾸미다 보니 이 사람이 살해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한 것이 되어 심각한 범죄로 입건되었다. 경찰 기록에 I will kill you!로 되어 있으므로 검찰은 그가 실제로 살의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고 주장, 입건 재판에서 많은 액수의 보석금이 책정되었다.
앞으로 이 사건의 공판이 열리게 된다면 피해자는 한국어로 너 죽인다 했다고 증언할 것인데 이 때 통역관은 I will kill you!로 통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정말 뜻하고자 하는 말의 ‘진의’가 아니라 틀린 통역이다. 통역된 영어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그 말하고자 하는 본래의 뜻이 아닌 정말로 내가 너를 ‘살해하겠다’가 되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이나 들은 사람 모두 살의가 없었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므로 ‘죽인다’고 말은 했지만 영어의 표현으로는 ‘가만있지 않겠다’ 정도로 번역해야 바른 번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법정 통역관이 가진 임무의 한계이다. 이 ‘죽인다’는 말의 번역 문제를 놓고 현직 판사를 포함해서 변호사 등 많은 전문가들과 광범위한 토론이 있었다. 통역관은 말하고자 하는 사람의 진의가 무엇인가와 관계없이 말 그대로를 번역해야 할 의무가 있고 그 진의를 법원에 설명하는 것은 통역관이 아니라 변호인의 몫이다. 말하자면 통역관은 ‘죽인다’고 번역해야 할 의무가 있고 한편으로는 사실은 ‘혼내주겠다’는 뜻이라는 설명은 변호사가 해야 된다.
문화배경이 다른 한국어와 영어 사이에서 섣불리 단어와 단어를 사전식으로 번역하다가 큰 일을 저지를 수 있고, 배꼽 잡는 코미디를 연출할 때도 있다.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또 세 치 혀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도 있다. 말을 가려서 하고 ‘죽인다’ 같은 위험한 소지가 있는 표현을 영어권에서는 조심해서 쓰지 않으면 봉변을 당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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