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면허박탈보다 현실 인정해야

2003-10-2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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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주 주지사 소환선거는 끝났지만 불법체류자에게 운전면허증을 주는 문제가 다시 주민 투표에 부쳐질 전망이다. 어째서 이것이 논란의 초점이 되고 있으며 어느 주장이 옳은지 짚어본다.

1846년 5월13일 미국은 멕시코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란 기치 하에 서부를 개척해나가던 미국으로서는 당시 멕시코 영토이던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를 차지하는 것이 꼭 필요했다. 1803년 당시 미국 영토의 2배에 달하던 광대한 루이지애나 일대를 프랑스로부터 푼돈에 산 적이 있는 미국은 이번에도 돈으로 문제를 풀려했지만 멕시코가 팔기를 거부, 실패했다.

그 결과가 1846년부터 1848년까지 계속된 미-멕시코 전쟁이다. 멕시코는 이 전쟁에서 지는 바람에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이외에도 네바다, 애리조나 등 국토의 절반을 잃었다. 이 싸움은 미국이 일으킨 여러 전쟁 중 가장 명백한 침략행위였다. ‘’뉴잉글랜드의 양심’으로 꼽히는 철학자 헨리 데이빗 소로는 이런 부도덕한 정부에 돈을 줄 수 없다는 이유로 납세를 거부하고 감옥에 가기도 했다.


미 국민들에게는 오래 전에 잊혀진 전쟁이지만 멕시코인들은 이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만약 150년 전 중국이 한반도를 쳐들어와 평안도와 함경도를 빼앗고 이를 중국 영토로 삼았더라면 이를 순순히 잊어버릴 한 국민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두 나라 사이에 국력 차이가 워낙 나기 때문에 아무도 공개 석상에서 말을 하지는 않지만 멕시코인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억울하게 빼앗긴 땅에 대한 분노가 스며 있다.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양국 국민의 서로 다른 태도가 불법체류자 문제가 이슈가 될 때마다 불거져 나온다. 대다수 백인들은 불법체류자란 법을 어긴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의료 및 교육 등 사회복지 혜택을 주고 운전면허증까지 발급해 살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란 생각을 갖고 있다. 이에 반해 멕시칸들은 힘에 눌려 빼앗기기는 했지만 원래 우리 땅이었던 곳을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하게 하고 차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깔려 있다.

그레이 데이비스 주지사는 임기 말년에 불법체류자도 합법체류자와 다름없이 운전면허증을 발급 받을 수 있게 한 법에 서명했다. 그러나 내년부터 발효 예정인 이 법은 차기 주지사로 선출된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폐기 의사를 밝혔고 공화당 주도로 이를 무효화하기 위한 주민발의안 상정을 위한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어 시행 여부가 불투명한 상태다. 이들이 이 안을 발의하는데 필요한 37만5,000명의 서명을 얻어 오는 12월7일까지 제출하면 이 법의 효력은 내년 3월 주민투표가 실시될 때까지 정지된다.

새 법 반대자들은 9.11 테러범들이 운전면허증을 신분증으로 사용해 비행기에 탑승, 범행을 저질렀다면서 불법체류자들에게 면허증을 주는 것은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설득력이 없다. 테러를 저지른 자들은 모두 합법적으로 미국에 입국했다. 수천명을 죽이기로 작정한 국제 테러단이 일반인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가짜 면허증이 없어 테러 행각에 애로를 겪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불법체류자에게 운전면허를 발급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반이민자가 아니라 법을 어기는 것에 반대하는 것뿐이라고 말하지만 이를 허용하지 않는 현행법이 반이민 바람이 한창이던 90년대 초 시작됐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불법체류자에게 의료 및 교육혜택을 박탈하는 프로포지션 187이 상정된 것도 이 때다. 이 법은 결국 법원에 의해 위헌 판결을 받고 무효화됐지만 라이선스 혜택 박탈안 찬성자 중 상당수가 당시 이 프로포지션을 지지했던 사람들이다. 1993년 이전에는 가주에서도 불법체류자들에게 신분을 따지지 않고 면허를 내줬다.

가주는 무면허 운전으로 인한 치사율이 21%로 전국 평균 13.5%보다 월등히 높으며 순위로 따져도 전국 2위다. 그 주요 원인은 운전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불법체류자들이 위험한 운전을 하기 때문이다. 불법체류자를 모두 추방하는 것이 실현 불가능함을 고려하면 이들에게 운전 시험을 치게 해 정상적인 드라이버로 만드는 것이 사실상 유일한 해결책임을 알 수 있다. LA 한인타운에서 불법체류자에게 라이선스를 주는 법 폐기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는 전기석씨는 미국에서 운전면허증은 생활하는데 영주권보다 더 소중한 물건이라며 안전 운전말고 인도적 관점에서라도 주는 것이 옳다고 본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운전면허증이 사실상 신분증이나 다름없다. 면허증만 있으면 합법이나 불법체류자나 생활하는데는 큰 지장이 없다. 면허증 발급을 둘러싼 찬반 논쟁은 결국 법을 어기고 미국에 사는 사람을 합법적으로 사는 사람과 똑같이 대우하는 것이 옳은 일이냐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법을 어긴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는 것은 결국 불법을 조장하는 것이라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모든 법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법학자들은 영국 불변의 보편적 가치가 담긴 자연법과 집권자의 결정에 의해 일시적으로 통용되는 실정법을 구별한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물건을 훔치는 것은 범죄다 등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회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자연법에 속한다.

반면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좌회전을 할 수 없다 이 지역 속도 제한은 시속 55마일이다 등등은 언제든지 교통량과 정책 결정자의 판단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실정법에 불과하다. 이 두 가지 중 이민에 관한 법률은 후자에 속한다. 오늘은 불법체류자라도 내일 연방 의회와 대통령이 사면법을 만들어 발효시키면 합법체류자가 된다.

현재 미국 내 불법체류자 수는 1,000만명으로 추산된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이 숫자는 지금도 매년 수십만명씩 증가하고 있다. 온갖 차별에도 불구하고 불법체류자 수가 이처럼 늘고 있는 것은 미국이 이들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 이민자들이 툭하면 하는 이들이 미 국민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대다수 불법체류자들이 하는 일은 청소와 막노동, 농장 노동 등 미국인들은 돈을 많이 줘도 꺼리는 것들이다.

이같은 현실을 인정하고 음지에 사는 불법체류자들은 사면을 통해 양지로 이끌어내고 미국에 와 일하고자 하는 외국인들에게 합법적인 노동자 신분을 부여하자는 움직임이 공화·민주 양당 지도자들 사이에 다시 일고 있다. 이런 흐름은 부시 취임 직후 있었지만 9.11 테러에다 민주당은 사면, 공화당은 노동자 신분 부여 안을 지지해 평행선을 달리다 요즘 들어 양쪽 안을 모두 포용하는 대 타협안이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다 사막에서 목말라 죽고 산 속에서 얼어죽는 멕시칸들의 모습은 범죄자라기보다는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보다 나은 삶’을 살겠다는 인간 집념의 정화 같은 느낌을 준다. 이제 와서 150년 전 불법으로 뺏은 땅이니 가주를 멕시코에게 돌려주라는 주장은 현실성이 없지만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 과오를 조금이나마 씻는 길이다. 따지고 보면 이 땅의 원주인은 멕시코도 그 전신인 스페인도 아니고 베링 해협을 건너온 인디언들이다.

이제 와서 불법체류자에게 주기로 한 운전면허를 박탈하려는 것보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이들에게 합법적인 체류신분을 주는 것이 미국의 정신에 부합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자유의 여신상’ 밑에 새겨진 라자루스의 시 ‘새 거인’에 나오는 시구 …나에게 다오. 너의 지치고 가난한 자를/ 자유롭게 숨쉬기를 갈망하는 얼싸안은 무리를/ 넘치는 해변의 가엾은 낙오자들을…를 다시 한번 음미해 보자.

<민경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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