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뮤지컬과 가면극과--

2003-10-0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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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국회에선 매우 흥미로운 논란이 있었다. 국군의 날 행사 때 벌어진 일을 놓고 야당이 국방부 장관을 호되게 몰아세운 내용은 일견 별것 아닌 듯 하면서도 노무현 대통령의 ‘내면’을 말해주는 핵심적 주제였다.

도마에 오른 안건은 노 대통령의 사열 현장-. 비를 맞으며 도열한 국군 장병들을 사열하면서 노 대통령은 의장대차에 올라 국방장관이 받혀 준 우산을 쓰고 지나갔다.

아니, 장병들은 비를 철철 맞으며 부동자세로 서 있는데, 국가 원수라는 사람이 양복 말끔히 차려입고 우산 받아가며 지나갈 수 있느냐? 진정한 지도자라면 우산을 마다하고 함께 비를 맞으며 사열에 나섰어야 했던 게 아니냐? 대충 이런 호통이었다. 또 우산을 받쳐 준 이가 국방장관이었던 점을 놓고 나이 많은 늙은 장관이 젊은 대통령 우산 받쳐들고 있는 것도 보기 민망하다는 질타도 나왔다. 당사자인 국방장관은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느낌도 든다며 민망한 표정을 짓고 멋쩍어했다.


내가 이 해프닝을 자세히 소개하는 이유는 바로 그 ‘민망한 장면’ 속에 노 대통령의 처신과 인식이 암암리에 숨어있다는 내 나름의 심증과 실망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노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솔직히 말해서 크게 기대하지 않은 사람 중 하나다. 국가 통치권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능력을 전혀 검증 받지 않은 미지의 인물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내 견해에 대해 지켜보면 의외로 일 잘하는 대통령이 될 것이란 말로 나와 다른 입장을 취하는 이도 적잖았다. 한데 요즘 그들도 허, 참--하고 말을 흐리거나, 당신 말이 적중해 가고 있구먼하고 내 생각에 동의를 표하는 이가 늘고 있다.

내가 노 대통령의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칼럼 난에서도 나는 그의 패기만만한 젊음을 기대했다. 80대 노인으로 보행조차 힘겨워 현장의 국사 챙기기에 등한한 김대중씨에 비해 현장을 뛰는 집권자가 되라는 기대만은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취임 8개월이 지난 지금, 솔직히 그런 기대도 무너졌다. 모내기 들판에서 농민들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며 농심을 어루만지는 모습도, 산업현장에서 노동자들과 땀 흘리며 애환을 듣는 장면도 본 적이 없는 탓이다.

나와 제법 많은 이들을 실망시킨 보다 더 중대한 사건은 태풍 내습 때 일어났다. 초특급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하기 시작한 바로 그 시각, 노 대통령과 그 가족, 청와대 고위직들은 삼청각에서 고급 요리를 즐긴 뒤 ‘인당수’라는 뮤지컬을 관람하고 있었다. 나라를 온통 아비규환으로 몰아간 천재지변이 예고된 속에 태평스럽게 뮤지컬을 보고 있었다는 것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한데 변명이 걸작이다. 문화진흥 차원에서 뮤지컬을 관람했다는 것이다. 입이나 다물고 있을 일이지, 말이나 되는 소린가.

대통령의 그 뒤 행보도 그렇다. 수해현장 한 곳만 시찰하는 걸로 ‘끝!’이다. 젊은 대통령이라면 작업복 입고 수재민들과 더불어 쓰레기도 치우고 라면도 먹어가면서 생의 터전을 잃고 방황하는 민심을 어루만져야 했던 게 아닌가. 노 대통령은 의외로 몸을 사리는 때가 많다. 국가 정책을 놓고도 ‘이것이다!’하고 딱 부러진 지도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여론 눈치를 너무 살핀다.

목하 한국 사회를 ‘이념 논쟁’으로 들끓게 하고 있는 ‘송두율 사건’만 해도 노 대통령이 처음부터 ‘법대로’를 지시했다면 이 혼란은 없었을 것이다. ‘김철수’라는 가명을 쓰며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북한 내 서열 23위의 자리를 수여 받고 북한을 수십 차례 오가며 적잖은 자금도 받아 쓴 것으로 확인된 그는 누가 보더라도 대한민국 법률을 어긴 범법자가 분명함에도 무슨 민주 투사인양, 양심적 학자인 양 뽐내며 귀국했다. 송두율씨는 자신을 ‘남북 대치의 벽 위를 걷는 경계인’으로 미화했다. 70년 대 유신 독재체제에 맞서 북한엘 갔으며 남북을 가른 중간 담 위를 걷는 ‘고뇌의 경계인’으로 살아왔다는 주장이다. 멋진 수사다. 하지만 남한의 ‘군사독재 체제’가 사실상 무너진 90년 대 이후, 그의 행적은 어떠했는가.

여전히 북한을 들락거리며 전대미문의 독재자인 김정일과 만나고 독일 유학생들을 북한에 가도록 유인했다. 그가 단 한번이라도 북한의 인권, 세습 독재를 비판했다는 기록은 전무하다. 그럼에도 이 말 저 말 변명에 급급한 모습에서 최소한의 학자적 양심도 갖추지 못했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송씨의 언행을 보고 있노라면 꼭 ‘가면극’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철학교수가 가면을 썼다면 큰 문제다.

궁지에 몰린 당사자는 그렇다 치자. 문제는 이 사건을 다루는 노무현 정권의 자세다. 송씨가 정보원 조사에 불려간 시간, 법무장관이라는 이는 그가 북한 정치국위원인 김철수라 하더라도 처벌하기는 곤란하지 않느냐고 중대한 말을 던졌다. 국법 준수를 독려해야 할 법무장관이란 사람이 중대한 범법 사실을 눈감자고 했으니 이 나라의 법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송씨 귀국을 앞두고 소위 공영방송이라는 KBS가 그의 범법사실은 덮어두고 미화에 급급한 특별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시리즈로 내 보냈다. 이 ‘가면극’ 뒤에도 곡절이 숨어 있다.

KBS 이사장이란 이가 송씨 초청에 개입하고 KBS를 지휘하는 사장 또한 송씨의 이념적 좌표에 동감하는 좌파 언론인으로 분류되고, 이들을 암묵적으로 민 정권 내 핵심세력이 있으리라는 의혹이 모든 내막과 진실을 웅변으로 말해 준다. 나는 다시 절망의 외침을 던질 수밖에 없다. 과연 이 나라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안영모)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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