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맞습니다, 네 맞고요”

2003-03-2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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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엔 ‘충격과 공포’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지만, 한국에선 세대교체의 가열 찬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있다. 40대 여성 장관이 들어 선 법무부에선 50대 검사장들이 줄줄이 사표를 쓰고 떠났다.

그 와중에 노무현 대통령의 인사 참모의 말 한마디가 관가를 벌집 쑤시듯 뒤집었다. “관리로 1급(차관보 급)까지 올라갔으면 할만큼 한 것이다. 승진 기회를 못잡은 사람은 집에서 애나 보고 건강 관리나 하면 좋지 않겠나. 로또 복권에 당첨되지 못하는 것도 운수 소관 아니냐?” 이쯤 되면 고위 관리들은 알아서 보따리를 싸라는 압력이다.

칼 잡은 쪽이 베겠다는 데 배겨 날 재간이 있겠는가. 영화 감독 출신 문화부 장관과, 군수(4급 서기관)에서 벼락 출세한 행정자치부 장관을 맞은 해당 관서의 고위직들도 집에서 애 볼 사람 많아질 공산이다. 어디 관리들뿐이랴. 정부 입김이 미치는 산하기관은 말할 것도 없고 명색이 언론이라는 KBS, MBC사장도 청와대 낙점을 받아야 한다.


더욱 희한한 일은 방송 프로그램에 단골로 나오던 탤런트와 개그맨들의 얼굴도 확 바뀌었다는 점이다. 지난 대선 때 이회창 후보를 지지한 연예인들 얼굴이 하나둘 브라운관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들 자리를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 새 얼굴들이 차지했다. 지금 한창 “뜨고있다”(?)는 한 개그맨의 경우 바로 ‘노무현 버전’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레퍼토리는 다름 아닌 ‘맞습니다, 네 맞고요’다. 노 대통령 말을 흉내내 히트를 한 것이다.

‘맞고요’의 언어적 이중성

나는 이 우스개 개그의 대상이 된 언어 속에 정치인 노무현의 특징적 전략이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토론의 달인’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입’하나로 정상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임기응변에 능하다. 민주당 후보경선에서 말 잘하기로 정평 난 이인제의 공세를 느긋하게 받아 넘겼고, 정몽준과의 단일화대결에서도 여유만만한 방어로 승기를 잡았다.

드디어 이회창 후보와의 한판 대결에서 그는 “무(無)관록과 무경험과 불안정”이라는 공세를 ‘말’로써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바로 ‘네, 맞고요’라는 말을 구사하면서 상대편 공세를 무장해제 시켰다. 일단 맞는다는 데 어쩌겠는가. 그러나 내용을 듣고 보면 그게 아니다. 다 듣고 나면 ‘맞고요’가 아니라 ‘아니올시다’다. 사실 이회창 후보는 TV토론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다. 논리정연한 말이 그의 특장이다. 그는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리다고 말한다. 틀렸는데도 ‘맞고요’하는 법이 없다. 선거 공약인 ‘법대로’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데 선거에서, 특히 말솜씨가 승패를 가름하는 한국 판 선거에선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고 내용보다 형식이 지배한다. 젊은 세대들은 똑 소리나게 반듯한 이회창 후보보다 노무현 후보의 어수룩해 보이는 생김새에 더 매력을 느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앞으로 모든 선거에서 승리하는 길은 정책이고 국가경영 청사진이고 하는 골치 아픈 것들이 아니라 대중에 어필하는 말솜씨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대권을 잡은 다음 노 대통령 말에서 ‘맞고요’란 표현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매우 단언적이고 공세적이며 압도하는 말투로 바뀌었다. 언론, 특히 보수논조의 신문을 향해선 ‘언론과의 전쟁’을 선언했고, 고위 검찰간부들을 보고는 “불신한다”고 일갈했다. 이 말 한마디에 검찰총장이 사표를 던졌다. ‘임기를 보장하겠다’는 대통령 약속을 듣고 마음을 놓던 그가 퇴임하면서 문제의 여성장관을 향해 “거짓말쟁이”라고 독설을 퍼부은 것을 보면 화가 나도 보통 난 게 아닌 성싶다.

대통령 말 따로, 장관 말 따로


노 대통령은 과거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상황론’으로 변명하곤 했다. 노조 투쟁 현장에서 자주 주장한 ‘재벌 해체론’이나 ‘주한 미군 철수론’에 관해서도 “당시의 현장 분위기를 대변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당초 주장에서 후퇴했음을 그런 식으로 넘긴 것이다. 한데 요즘 그는 자신이 한 말을 궂이 변명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엔 가타부타 답하지 않고 넘긴다.

얼마 전 경제 부총리라는 사람이 ‘미국의 북핵 폭격설’을 공개해 논란을 빚자 노 대통령이 그를 크게 나무랐다고 청와대측은 발표했다. 하지만 당사자를 만나선 야단을 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화 감독 출신 문화부 장관이 취재 가이드 라인을 발표해 언론계로부터 “신판 보도지침”이라고 반발하자 노 대통령은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장관을 나무랐다. 한데 장관 자신은 “무슨 소리냐. 대통령도 나와 똑 같은 생각”이라고 되 받아쳤는데도 그 뒤 소식이 없다. 청와대 대변인의 잦은 실수도 골치다. 청와대 따로 부처 딴 말이다.

왜 이런 불협화음이 들리는 것일까. 노무현 정권의 핵심들은 조직 속에서 자라 온 이들이 아니다. 대부분 운동권 출신들이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 복역한 이들도 꾀나 많은데, 그 때문에 군대 밥도 먹어 보지 못한 이가 태반이다. 나이가 차 면제를 받은 것이다. 그러니 조직을 지휘한 경험이라곤 전혀 없다.

노 대통령부터 청와대 참모 각료 정부 요직에 이르는 소위 정치직들 대부분이 자유주의적 인생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대권을 움켜 쥔 사람들이다. 그러니 조직 관리니 지휘니 행정을 알 턱이 없다. 대부분이 생각 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이런 지적에 노 대통령 입에서 “맞고요, 네 맞습니다”라는 말조차 들리지 않는다. 더 이상 로키로 나올 이유가 없어서일까.

안영모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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