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종교의 대 사회적 기능

2003-03-20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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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회의 형성에는 반드시 종교가 작용하였고 그 어느 시대에도 사회나 국가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종교적인 가치관과 기능이 선도적 역할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대 사회나 국가를 향한 종교의 역할은 크다.

기독교 달력에 따라,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억하는 이 거룩한 수난절에, 미국의 대 이라크 침공을 향한 계획들이 드디어 초읽기에 들어갔다. 미국은 그 동안 자신들이 공들여 세웠던 국제질서나 유엔의 결의도 뒤로 한 채, 자신들의 최소한의 우방인 영국, 스페인과 함께 전쟁을 향한 전의를 다진바 있다.

이 나라 정권의 수장은 이라크 공격의 최소한의 일관된 논리도 갖추지 못한 채, 다만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당연히 무력을 사용할 주권적 권리가 있다"라고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매일 아침 기도와 성서 읽기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그가, 이라크가 알 카에다를 지원했다는 애초의 이유에는 적절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이제는 자신이 신봉하는 "신의 뜻에 따라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칼을 든다는 것이 작금의 최고 전쟁 명분이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권선징악의 접근법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려는 그의 종교관은 분명히 ‘근본주의적 배타주의’ 신앙관으로 지극히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런 그가 이제 세계 제 2위의 석유 매장국인 이라크 정권의 정치 수장을 절대 ‘악’으로 규정하고 그를 제거하는 데에 온갖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적 신념으로 설정된 ‘악’의 제거를 위하여, 현대판 ‘십자군 전쟁’과 같은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전쟁 명분은 아무리 보아도 비판을 면키 어렵다. 이는 그가 매일 아침 묵상하며 읽고 있을 성경 말씀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에도 참으로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다.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구약의 ‘복수’ 규례 대신 새로운 사랑의 계명을 제시하시지 않았었던가?-"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위하여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더구나 그가 규정한 악이 다름 아니라 단지 한 사람, 사담 후세인이고 그를 제거하는 일이 이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위해 치르는 이 전쟁의 대가는 너무나도 엄청나고 잔인한 것이다. 우선 그로 인해 무고하게 죽어가야만 할 어린 생명들과 아낙네들의 모습만이라도 상상해 보자.

교회는 세계 공동체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만을 고려하며 횡포를 일삼으려는 자들에게 분명한 제동 장치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할 것이다. 아니 자신들의 현안이나 목전의 이익만을 염두하고 있는 국수주의적 배타주의 책동들을 교회들이 앞장서서 막아내야만 할 것이다. 처절한 십자가의 고통을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핵심적 삶은 무엇보다도 "디아코니아"(행동) 그 자체였다.

인간의 죄악으로 발생한 수많은 왜곡된 현상(전쟁, 가난, 억압, 착취, 소외, 슬픔 등)들을 근본적으로 고치고 치유하는 것이 바로 그 분의 사역이었다면, 그 분의 몸이기를 자처하는 그리스도 교회는 당연히 한 사회나 국가의 양심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교회가 한 사회나 국가 공동체를 이끌지 못하고 오히려 이끌려 가게 된다면 사회나 국가의 구조 악과 부조리에 대한 책임을 면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조일구/호놀룰루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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