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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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도 제왕적 ?

2003-01-2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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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에 헌신한 공로로 집권에 성공한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은 재임 기간 동안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욕을 먹었다. ‘문민통치니’ ‘행동하는 민주주의의 양심’이니 하고 자칭한 당사자들이 그런 욕을 먹게 된 것은, 전임 군부 정권이 무색할 정도로 권위주의적 일인통치와 전횡을 일삼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한 사람은 국가경제를 결딴내고 손가락질 받으며 물러나야 했고, 또 한 사람은 국민 갈등과 권력형 부정부패로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쓴 채 한 달 뒤면 청와대를 떠난다. 그 10년은 정말 길었다.

누가 집권하더라도 서민들 부화 끓는 그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을 듣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 소망은 좀처럼 이뤄질 것 같지 않다. 노무현이라는 젊고 소탈하고 덜 권위적으로 보이는 신진이 등장한 만큼 ‘낡은 정치의 유산들’이 말끔히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당선자와 그를 둘러 싼 측근들의 최근 언행들은 국민들의 소망을 하나 둘 무너뜨리고 있다.

특히 노무현 정권의 산실인 ‘정권 인수위원회’는 마치 혁명으로 집권한 “점령군 행세를 한다”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인수위 출입 기자실은 늘 긴장에 싸여있다. 까딱 집권측에 불리한 기사가 나갔다가는 봉변을 당하기 일쑤다. 최근 한 유력지 고위 간부는 필자에게 “내가 집권하면 모모한 신문은 문 닫을 각오를 해야할 것”이라고 노무현 후보가 술자리에서 일갈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올 초 노 당선자가 좌파적 논조의 한 일간지를 불쑥 찾아 간 이색 행보도 마음에 걸린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세무조사라는 초강수의 언론 징벌을 단행한 DJ정부에 이어 노무현정권의 언론개혁이 어떻게 전개될지 걱정이 태산같다는 것이었다.


‘좌파 정권’ 발언한 경제계 인사에 사퇴 압력
얼마전 인수위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 한 간부를 인사조치하라는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다. 그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정권을 ‘좌파적 정권’이라고 규정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인수위측의 압력이 계속되자 당사자는 회견 내용을 부인했고 전경련 회장은 사과 편지를 정중히 보냈다. 노무현 정권의 정책 색깔이 ‘좌파적’인 인상을 주고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느끼는 바임에도 왜 그렇듯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좌파적이 아니라면 조목을 따져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하면 그만이다. 발언 당사자의 목을 자르라는 것이야말로 옛 권위주의적 정권에서나 있었던 일이 아닌가.

요즘 인수위는 정부 각 부처로부터 DJ정권이 추진해 온 정책을 보고 받고 있다. 한데 그 과정서 인수위원들은 톡톡히 점령군 행세를 하고 현 정부측은 잔뜩 주눅이 든 모양이다. 세류에 영특하기 이를 데 없는 관리들로선 인수위 생각이 틀렸다 하더라도 그들의 심기를 거슬려 출세 길이 막히는 일을 할 리 없다. 아니 어떻게 하면 예쁘게 보여 다음 정권에서도 입신 출세할까 이 눈치 저 눈치 살피기 바쁘다. 어떤 부처가 ‘노무현 공약’에 어긋나는 보고를 했다가 혼쭐났다는 말이 나온 다음, 각 부처는 당초 보고내용을 휴지통에 쑤셔 넣고 ‘노무현 공약’ 베끼기로 날밤을 세웠다는 소식도 들린다.

노동부는 고용정책에 대해 점진적 개혁을 보고했다가 노무현 당선자로부터 직격탄을 맞은 대표적 케이스다. 노동정책의 전면 개혁을 단 시일 내 추진한다는 게 인수위 방침이다. 바로 이 문제가 좌파적 정책이라고 재계가 반대하는 부분이다. 공무원 노조문제를 놓고도 인수위는 “나를 따르라”는 식이다.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 집단이 무슨 노조냐는 반론은 이제 한국에선 자취를 감췄다. 공무원 노조라는 명칭도 허용하고 협의권도 주겠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봉급을 인상하라며 공무원이 머리띠를 두르고 관공서 마당에서 파업집회를 할 수 있는 자유천지(?)가 될 것 같다. 행정자치부 관리들이 “거기까지는 곤란하다”고 난색을 보였지만 “잔소리 말라”는 면박을 받고 후퇴했다. 인수위안에도 당선자 측근인 핵심세력들의 세도는 대단하다. 정부에서 파견된 한 차관급 인사가 당선자의 공약과 다른 말을 하자 하위 인수위원은 “그 사람 정리해 버려야한다”고 기고만장했다.

‘점령군 행세’하는 정권 인수위
이 해프닝이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념과 세대 갈등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다. 정권 인수위를 구성하고 있는 주류들의 생각은 ‘확 뒤집자’는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상아탑의 강단에서 이론을 가르치던 40대 교수들이다. 불타는 이상주의자들이며 전후의 풍족한 삶을 살아 온 행운아들이다. 하지만 과거를 힘들게 살아 온 나이 지긋한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개혁을 하려면 현실을 알고 대들고 주 5일 근무다 뭐다 해서 놀자 판으로 나갈 게 아니라 허리띠를 더 조일 때”라는 게 그들의 목소리다. 경험적 충고며 조국분단과 무한 경쟁의 국제정세를 주목한 경고다.

수도 이전 등 노무현 당선자가 선택한 굵직굵직한 정책들은 5년간 국가 시책으로 추진될 것이다. 문제는 새 집권자가 YS나 DJ가 그랬듯이 제왕적 고집과 권위 때문에 정책의 시행착오를 겪게된다면, 국가적 손실은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또 5년, 합해서 15년을 그렇게 보낸다면 이건 정말 보통일이 아니다. 주름살 깊어진 나이 든 이들이 노 정권을 주목하는 이유다.

안영모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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