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상사는 이야기 꿈꾸는 연말

2002-12-28 (토)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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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왔을 때 이곳의 따뜻한 날씨에 어울리는 많은 꽃과 푸른 나무들은 낯선 거리를 대하는 나의 긴장된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그러다가 거리가 낯익어 갈 무렵에 맞은 연말은 그 따뜻한 날씨로 해서 나를 맥빠지게 했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평소에는 이곳이야 말로 내가 살기에는 딱 맞는다고 여기다가도 달력이 한장 남는 12월이 되면 어딘지 모르게 긴장감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서울에서 맞던 12월은 발 시리도록 차가운 보도를 걸어서 다니던 교회 학생성가대의 성탄축하 성가연습으로 시작됐었다.
어두운 골목을 한참 걸어서 추위에 움추린 몸으로 교회에 들어서면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 옆으로 친구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무게잡는 선배들의 모습이 꽉 찼었다.
성가연습을 마치고 초코파이를 간식으로 먹고 다시 집으로 향할 때면 방향이 같은 친구들과 길을 걸으며 가게 앞에 내놓은 따뜻한 김이 가득히 들여다보이는 찜통속의 호빵을 하나씩 더 사먹기도 하였다. 노래는 별로 잘 못 부르지만 성가연습을 하느라고 속에 있는 소리를 다 밖으로 쏟아내고 콧끝이 시리도록 추운 골목길을 걷자면 머리가 맑아진 느낌이 참 좋았었다.
몸속이 깨끗하게 빈 것 같던 그 느낌속에서 집으로 향하는 마지막 긴 골목을 걸으며 혼자 세워보던 신년계획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내가 싫어하는 나의 습관들을 바꾸겠다던 결심들과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할 일들을 쭉 챙기다보면 어느새 집앞에 다다르고, 집안으로 들어 설 때면 나의 신년이 밝고 따뜻하게 다가올 것 같은 기대가 생기고는 했었다.
그러던 것이 이민 와서 몇 년은 너무 안 추워서 영 분위기가 안 잡히는 바람에 연말이 정신없이 지나고, 또 이곳의 겨울도 벅차서 덜덜 떨게된 후부터는 결혼을 하게되고 그후 가족들과 다른 일들로 바빠져서 새해가 오는지 헌해가 가는지 느낄 새도 없었다.
올해만 해도 아이들이 저녁에 안자고 놀자는 바람에 언제 커서 자기들끼리 씻고 들어가 자게 될까를 기다리다보니 한해가 다갔다.
잡아도 가는 것이 세월이라더니 내년이면 막내가 프리 스쿨을 가게되고, 가끔은 감기가 걸려서 열이 나는 아이들을 주무르며 밤잠을 설치던 나의 올해의 끝이 어이없도록 빨리 온 듯하다.
연말을 맞으며 새삼 느끼게되는 것은 지난 몇 년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필요 없는 일에 마음을 쓰고,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도 참고 기다리지를 못하고 조바심을 낼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세밑의 요즈음 나는 다시 꿈을 꾼다. 내년에는 나의 의식과 생활속에 젖은 헌 습관의 틀을 벗어버리고 새로워지는 내 모습을 말이다.
마음은 있으면서 생활에 밀려서 꼭 하고 싶었던 일들을 미루는 게으름, 으레 하는 인사들에 건성으로 인사를 주고받는 일들, 꼭 중요한 일이 아닌 데도 거절하지 못해서 일을 만드는 무분별함, 그래서 생긴 자업자득의 일을 하면서 툴툴거리는 습관들을 털어 버리고자 요즘은 찬찬히 정리를 시작했다.
걸려만 있는 옷들을 걷어 구제품으로 보내고 밀린 서류와 안보는 책들을 책장에서 뽑아내는 일이 생각보다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매순간 내렸어야 할 결정을 몰아서 하려니 이럴게다. 하긴 물건정리야 앞으로 닥칠 의식과 습관의 정리보다야 훨씬 쉬운 편일 것이다.
젊다 못해 어리던 학창 시절에 세우던 계획들보다야 훨씬 덜 거창할지 몰라도 거품을 뺀 실질적인 목표를 세워본다. 이제는 아이가 여럿 딸린 아줌마이지만 마음을 갈아서 새해 계획을 세우고 올해를 정리하다보니 마음의 군살이 조금씩 빠지는 느낌이다.
간단하고 소박하지만 기쁜 삶을 사는 하루하루, 내가 해야할 일들의 우선 순위를 지키는 집중된 에너지의 삶, 또 금방 커서 날아갈 우리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일들을 생각하며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고 다가오는 신년의 변화된 나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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