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율배반

2002-07-18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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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율배반은‘서로 모순, 대립하여 양립하지 않는 두 명제가 동등한 타당성을 가지고 주장되는 일’이라고 사전에 정의돼 있다.

중·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유치환 시인의‘깃발’과 한용운 시인의‘님의 침묵’을 배우며 선생님으로부터 이율배반적 표현의 묘미에 대해 설명 들었던 일이 생각난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 깃발을 표현한 유 시인, 님이 떠나는 데도 떠나 보내지 않았다는 한 시인. 이들의 시는 최근 여성 총리서리 아들의 국적을 둘러싼 소모적인 논란에 그대로 투영된 듯 하다.


반만년을 단일민족으로 살아온 한민족은‘혈통’을 중시한다. 더군다나 일국의 총리가 될 사람이 한국인들의 몸에 밴 순수주의를 거역하고‘외국 사람’을 아들로 뒀으니 거부감이 들만도 하다.

그러나, 이 같은 논란이 최근 한국의 중산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민권 취득을 위한 미국 원정출산 붐 속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헷갈린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며느리를 꼬집어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한국의 임신부들이 거금을 들여‘미국인 아들, 딸’을 낳기 위해 LA로, 뉴욕으로 쇄도한다.

총리서리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아들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도덕성이다.

그렇다면 미국에 사는 일반 한인들도, 시민권자던 아니던 간에, 비슷한 시선을 받아야 하나? 본국에 있는 우리 부모도 조국을 버린‘매국노’나‘배반자’자녀를 둔 것으로 매도돼야 하나?

한국 정부는 60년대 후반 이후 줄기차게 해외이민을 권장해왔다. 그 덕택에 30여년이 지난 오늘에는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한국인을 만날 수 있
다.

원정출산으로 태어난 아이들 세대에서는 미국 시민권자가‘애국자’로 대우 받게될 지도 모를 일이다.

<정락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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