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DJ와 히딩크

2002-07-0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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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서울에선

▶ 안영모(언론인)

김대중 대통령(DJ)은 지난달 22일 광주에서 벌어진 스페인과의 월드컵 8강 전을 참관했다. 손에 땀을 쥐게 한 승부차기 끝에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침한 바로 그 순간, 두 손을 번쩍 쳐들고 환호하던 DJ의 눈가에 불현듯 이슬이 맺혔다. 대통령이 눈시울을 붉힌 것은 값지고 힘들었던 승리를 쟁취한 데 대한 벅찬 감격 탓이었을 것이다. 한데 DJ의 눈물은 감격 이상의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듯도 했다.

광주(光州), 정치 고향이며 요람인 ‘빛고을’, 그곳은 DJ에게 아주 특별한 기회를 선물한 곳이다. 질곡과 혼돈의 세월이었던 80년, 광주 금남로의 함성과 항거가 없었던들 DJ의 오늘은 보장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웅비의 날개를 달아준 바로 그곳에서 4강의 승전보를 목격한 그로선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처절한 회오(悔悟)가 가슴을 쳤을 것이다. 불과 하루 전인 21일, DJ는 기력이 쇠잔하고 망연한 표정을 지으며 국민들에게 머리를 숙여야했다. 셋째 아들에 이어 둘째마저 비리혐의로 쇠고랑을 차자 국민 앞에 선 것이다. "제 평생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렇게 참담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이는 모두가 저의 부족함과 불찰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목소리는 자질어 들고 표정은 침울했다.


월드컵 4강 진출 승리에 포효하는 저 함성, 바로 5년 전, 권력 정상을 향한 힘겨운 싸움에 나선 그 때도 저렇듯 우렁찬 함성이 들리지 않았던가. 그 때 가슴을 뿌듯하게 해주던 "사랑해요, DJ!"의 함성은 어디로 갔는가. 아니 "선생님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던 저 ‘고향 사람들’조차 이제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노성을 발하고 있다니, 이게 무슨 낭패인가…. 아마도 만감이 교차하며 불현듯 뜨거운 것이 가슴을 엄습했을 지 모른다.

DJ는 스테디엄의 함성을 뒤로하고 선수실로 내려가 수훈을 세운 태극전사들을 격려하고 치하했다. 그리고 옆에 서있던 거스 히딩크 감독과 악수를 나누고 가볍게 포옹했다. 오늘의 영웅, 언제 우리민족이 외방인을 이처럼 열렬히 좋아하고 사랑한 적이 있었던가. 그 외국인 감독을 향해 DJ는 최상의 말로 치하했다. "정말 우리 선수들을 훌륭히 훈련시켜 오늘의 성공을 가져 온데 대해 한국민을 대신해 치하합니다."

히딩크, 네덜란드 출신으로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은 지 1년 반만에 그는 한국민들의 가슴속에 길이 남을 영웅이 돼 있었다. 지금 한국이 히딩크 열풍에 휩싸인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세계 축구 서열 40위의 한국을 4강에 올려놓다니, 참으로 기적 같은 수훈을 세웠기 때문이다. 히딩크의 성공 비결은 무엇인가, 지금 한국은 히딩크 연구에 함몰되고 그 열병에 들떠있다.

온갖 분석과 해석이 매일 신문지상을 장식한다. 지연과 학연이 판치는 한국병을 과감히 바로잡아 어떤 외부 압력도 물리친 채 실력 위주로 선수를 선발하고, 자기 자신이 선두에서 솔선 수범하여 선수들의 존경심을 이끌어 내고… 하여튼 그가 보여준 조직관리력은 이미 바이블이 됐다.

그의 성공의 핵심은 간단했다. 원칙과 규정을 정확히 지키면서 선수들을 조련한 것이다. 밥그릇 수를 따지는 허명의 선수는 과감히 대표단에서 빼거나 벤치에서 명령을 기다리게 했다. 한마디로 서구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준엄한 관리자’로서 임했던 것이다.

DJ는 그런 히딩크를 포옹하며 무엇을 느꼈을까? 한국민의 열렬한 박수와 찬사를 받는 이 이방인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을까? 요즘 자신이 처한 처절한 입지를 통감하면서 "왜 나는 히딩크처럼 ‘엄격한 통치자로서 나라를 다스리고 자식들을 관리하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하고 회한에 싸이지는 않았을까? 임기 내내 요직은 지연과 학연에 따라 가르고 일탈한 행동을 한 주변 인물들을 일벌백계하지 않은 채 적당히 눈감아 준 결과가 바로 오늘의 불행을 자초한 것임을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한편으로 목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히딩크 신드롬’에 대해 나는 마땅찮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계약금, 4강 보너스, 광고 출연료 등을 합해 어림잡아 100억원(약 90만 달러)을 벌어들인 것이 잘못됐다거나 배가 아파서가 아니다. 우리는 지금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상적 환희에 들떠 경쟁적으로 그를 떠받드는 데 정신을 뺏기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정부에선 국가 최고훈장을 수여하고 명예 시민권과 명예 박사학위가 건네 지고 비행기 평생 무료 탑승 혜택이 주어지고 기업체에선 광고에 모셔가려고 줄을 서고 있다.

한번 곰곰이 따져보자. 히딩크, 그는 누구인가. 한국축구협회가 20억원(약 16만달러)의 계약금을 주고 고용한 직업 축구감독이다. 네덜란드 사람답게 합리주의와 자본주의 정신 아래 계약된 일을 충실히 해왔을 뿐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그는 돈 받은 만큼 노력한 철저한 프로일 뿐이다. 일부에선 그의 한국귀화를 추진하려 한다지만 막상 히딩크 자신은 월드컵이 끝나는 대로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중을 밝혔다. 이 시간 현재 그는 한국민들의 열화 같은 친절에 일편 감사하면서 일편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과공(過恭)이 비례(非禮)란 말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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