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거인의 무덤’

2002-06-2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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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시각

▶ (브룩 라마/ 뉴스위크)

순수 축구 팬들에 따르면 이번 대회는 엉망이다. ‘아름다운 게임’을 펼치던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아르헨티나 등은 모두 나가떨어지고 터키와 세네갈, 한국과 미국 등 ‘흉한 경기’를 벌이는 신출내기들이 올라왔다. 이들은 힘과 스피드는 갖추고 있지만 스타일은 없다는 것이다.

내 의견은 이렇다. 그런 불만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번 대회는 무명 팀들의 선전 덕으로 스포츠 사상 가장 볼만한 장관을 이룩했다. 이번 월드컵은 처음 그 이름에 걸맞는 대회가 됐다. 주최측이 아시아에서 대회를 열기로 했을 때 축구의 세계화가 그 목표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들도 1 라운드에서 4명의 거인들이 나가떨어지고 4명의 신참이 8강에 오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과 터키는 지난 48년 간 통산 한 게임을 이겼을 뿐이다. 아직도 브라질과 독일이 우승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점치고 있지만 그럼에도 신참들이 이룩한 업적은 월드컵과 그들 나라에 엄청난 자신감을 심어줬음에 틀림없다.
한국 팬들이 지난 주 대전 스태디엄 앞에 건 대형 배너에는 ‘지옥 문, 거인들의 묘지’라고 쓰여 있었다. 대회전 세계 랭킹 40위였던 한국이 3번이나 챔피언을 차지한 이탈리아를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러나 게임 117분만에 안정환이 골든 골을 터뜨리자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이던 이 배너의 구호가 현실로 나타났다.


나흘 후 한국은 개인기가 뛰어난 스페인을 다시 물리쳤다(명백한 스페인의 골이 무효 판정을 받은 탓이기는 하지만). 스페인 선수들도 이탈리아 선수들처럼 지옥 문 구경을 했다. ‘붉은 악마’라는 적절한 이름이 붙은 수백 만의 열광하는 팬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처럼 거인들이 많이 쓰러진 이유는 무엇인가. 너무 게임을 많이 해 지쳤고 코치가 너무 압력을 넣었고 선수들간에 협력이 이뤄지지 않았고 등등의 원인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축구의 국제화로 강팀과 약팀의 갭이 줄어든 데 있다. 축구 개발 도상국가 중 점점 더 많은 수가 선진 팀에서 뛰고 있다.

미국 선수의 절반은 유럽 팀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프랑스를 꺾은 세네갈 선수 전원이 프랑스에서 뛰고 있다. 이탈리아 페루지아에서 활동 중인 안정환은 이탈리아와의 게이에서 이기자 "반역자"로 불리며 퇴출당했다.

월드컵은 늘 축구 실력 못지 않게 각 국 체면과 관련이 있다. 정몽준 축구협회장에 따르면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눌려 지내온 한국은 이번 월드컵을 통해 "해방감"을 맛보았다. 월드컵이 한국을 하루아침에 바꿔놓거나 승리의 기쁨이 오래 가지는 않겠지만 한국이 보여준 경기 내용은 올해 월드컵이 스포츠 사상 가장 신나는 순간으로 각인되게 하는 데 충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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