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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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의 ‘미소‘와 민심

2002-06-1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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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서울에선

▶ 안영모<언론인>

지방선거의 뚜껑이 열린 13일 저녁, 한나라당의 이회창 대통령 후보는 표정관리를 하느라 짐짓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낭보인가! 그는 속으로 이렇게 쾌재를 부르며 솟구치는 웃음을 참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DJ 정권에 등을 돌린 민심 덕분에 ‘선전’을 하리라든 예측을 넘어 거의 ‘완승’에 가까운 성과를 올렸으니 그 환호가 오죽했겠는가. 영남은 그렇다 치고 정치적 의미가 보통이 아닌 서울과 수도권에서 숙적 민주당을 넉아웃시킨 데다, 충청권의 일각을 무너뜨려 JP(김종필)에 회심의 펀치를 날렸으니 속도 후련하려니와 이제 청와대 문을 두들기는 일만 남았다고 내심 환호했을 법하다.


“순풍아, 여섯 달만 불어 다오!”


이 시간 현재 그와 한나라당이 축배를 든다해서 나무랄 일은 아니다. 국회 다수당에 지방의 행정조직까지 거머쥐었으니 샴페인 잔을 들어올린들 누가 탓하랴. 선거 전만 해도 DJ의 아들들과 주변, 그리고 권력 핵심의 부정부패로 민심이 들끓는 가운데서도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에 대한 여론 지지는 지지부진했다. 한 때 여론조사에선 노무현 후보에게 20포인트나 뒤쳐져 있었다.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DJ 인기가 바닥을 치고 노무현 후보가 그런 DJ를 감싸는 ‘돌쇠’였기 때문이었다.

한데 막상 표를 까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번 선거에 최초로 도입한 지지 정당 투표에서 한나라당이 얻은 표는 민주당, 자민련 및 기타 정당의 득표를 모두 합친 것을 능가하는 50.2%를 획득, 기염을 토했다. 이회창 후보 역시 지지도에서 노무현 후보를 확실히 따돌 렸다.

이회창 후보가 탄 범선은 분명 순풍을 만났다. 잘만하면 상대방의 자중지난으로 또 다른 어부지리를 얻을 수도 있다. 벌써 민주당 내에선 선거 참패에 대한 책임론이 일고, 노무현 후보의 교체설까지 설왕설래되고 있는 지경이다. 하기야 영남권에서 민주당이 한 석도 건지지 못하면 재신임을 받겠다고 자신의 입으로 약속했으니 누굴 탓하겠는가. 만약 노무현 후보가 이 공약을 유야무야로 넘긴다면 식언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달려들 것이다. 이러니 저러니 사면초가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회창 후보가 솟구치는 웃음을 참으며 “바람아, 반년(6개월)만 그렇게 불어다오!” 하고 두 손 모아 비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자신에 대한 ‘역풍’과 상대로부터의 ‘돌풍’만 없다면 권좌는 ‘떼 논 당상’인양 코앞에 와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민심은 바람이다

하지만 세상 물리가 다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바람의 생리로 말하자면 더욱 그렇다. 언제 어디서 역풍과 돌풍이 몰려올 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회창 후보에겐 무엇이 역풍인가. 아들의 병역 면제에 대한 리바이벌, 이런 저런 금전 수수설, 지도자다운 풍모 결함 등 자신을 둘러싸고 공격받고 있는 ‘개인적 약점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강력한 역풍은 청렴성 시비. ‘대쪽의 정의파’라는 그를 향해 노무현 측은 ‘부패와 비리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구태의 정치인’이라는 라벨을 붙였다. 그렇다고 딱 떨어진 물증이나 증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최 모라는 로비스트로부터 방미 때 측근을 통해 20만달러를 받았다는 ‘물증 없는 주장’이 전부다. 그러나 민주당 측은 대선 직전 이회창 후보의 비리 의혹에 대한 메가톤급 폭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한편 상대 진영으로부터 돌개바람도 불어닥칠까? 노무현 후보가 민주당 지명전 때처럼 돌풍을 일으킬 가능성은 거의 없다. ‘노풍’은 이미 소멸됐다. 새 태풍에는 어차피 새 이름이 붙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몰려올 새 바람의 ‘눈’은 무엇일까?


바로 정계개편의 바람이다. 이인제-박근혜-정몽준의 앙상블 트리오를 위한 조용한 튜닝의 소리가 들린다. 여기에 나락으로 떨어진 민주당에 ‘헤쳐 모여!’ 구령이라도 떨어진다면 아마도 오케스트라의 규모로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노무현은 콘닥터의 자리에서 물론 내려와야 한다.

과연 그리 될 수 있을까? 개연성(Probability)은 있지만 가능성(Possibility)은 크지 않다. 실현될 가능치가 낮다는 의미다. 위의 3사람, 아니 노무현 후보까지 4사람 모두가 ‘독창’의 명가수라 ‘코러스’의 화음을 기대하기는 난망이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에 대한 역풍이 위력을 발휘해 지지도가 다시 곤두박질 친다면 뉴페이스의 출현을 바라는 여망의 목소리는 드높아 질 것이다. 그리고 예측하지 못한 정국의 대반전이 몰려올 것이다.

목하 승리에 도취한 이회창 후보가 이런 바람의 생리를 알고 있을까? 민심은 언제라도 물줄기를 트는 유수와 같고, 깨지기 쉬운 유리와 같다는 점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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