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낙찰계, 무엇이 문제인가?

2002-05-22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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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원 30~40명 다중계약…법적 구속력 기대난

계(契)는 한인이민과 함께 미국에 들어온 한국의 고유문물이다. 한인사회의 급속한 경제 발전이 계라는 독특한 자금조성 방법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회학자도 있다. 계는 미국에서도 이미 합법성을 인정받았다. 고 이태순씨의 계 파동을 계기로 계의 문제점들을 알아본다. <편집자 주>


국어사전을 보면 계는 “여러 사람이 같은 목적 아래 돈이나 물건을 얼마씩 추렴하여 서로 운용하는 우리 나라 고유의 협동 자치기관의 하나”라고 풀이돼 있다.

크레딧만 좋으면 쉽게 융자받을 수 있는 미국이지만 한인사회의 웬만한 직장이나 교회, 동창회 등 단체에서는 구성원들 사이에 번호계가 꾸준히 성행하고 있다. 자녀 대학등록금, 모국방문, 해외여행, 새차 구입 등이 번호계의 보편적인 용도로 돼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낙찰계는 순번에 따라 일정액을 수령하는 번호계와 달리 곗돈 탈 사람의 순번과 수령액이 정해져있지 않다. 누구나 가장 높은 이자를 신입하면 먼저 탈 수 있기 때문에 사업을 새로 시작하거나 확장하기 위해 목돈이 급히 필요한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

낙찰계는 5만달러 짜리가 보통일 정도로 규모가 크다. 이씨도 피살되기 전에 2만5천달러짜리 낙찰계 두 개를 동시에 꾸려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계원수도 계주 3명이 10명씩 모아 30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통례여서 이씨 계의 경우처럼 계원들이 서로 모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낙찰계가 한번 깨지면 한인사회 전체가 시끌벅적하게 마련이다.

LA에서는 작은 호텔과 식당을 착실하게 운영했던 중견 여류사업가를 죽음으로 몰고 간 큰 낙찰계 파동이 이미 20여년 전에 터졌다. 교회 장로가 곗돈을 챙겨 온 가족과 함께 잠적한 사건도 있었고 라스베가스에 가서 곗돈을 노름으로 탕진한 계주도 있었다. 뉴욕에서는 부부가 3만~5만달러 짜리 낙찰계를 9개나 운영하며 7명의 가공인물 명의로 30여만달러를 횡령한 사실이 들통나 뉴욕 한인사회가 발칵 뒤집혔었다.

시애틀에서는 1991년 모 식품점 주인이 조직한 낙찰계가 깨져 첫 계 파동을 기록했다. 피해자들은 계원들이 누군지 알 수 없었고 곗날 식품점에 가면 계주가 다른 계원들이 이미 다녀갔다고 거짓말을 했다며 계주가 가공인물 명의로 계를 8번이나 탔다고 주장했었다.

계는 미국사회에서 불법행위로 간주돼 왔다. 그러나 1990년 11월 샌프란시스코 연방파산법원은 계주인 송모 여인이 낸 파산신청을 다루면서 “비록 미국에서일지라도 어느 한 나라의 오랜 풍습이 그 민족 사이에 꾸준히 지켜지고 있다면 이는 마땅히 합법적인 행위로 인정해야한다”며 송여인은 파산신청으로 깨진 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낙찰계가 일종의 계약으로서 법적 구속력을 갖는데는 문제가 많다. 우선 당사자가 30~40명에 이르는 다중계약인데다 곗돈의 수령액과 수령시기가 전혀 정해져 있지 않아 계약문서로 작성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계가 깨질 경우 누가 누구에게 채권을 행사하느냐도 애매하다. 다중계약에서 계주 혼자 책임을 진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서북미 한인은행의 박우성 행장은 요즘 은행 적금이 계의 장점을 많이 가미하고 있다며 계약액의 일부만 불입하고 나면 적립금액은 물론 크레딧이 좋을 경우 계약액 전액까지도 융자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행장은 적금이 낙찰계보다 이자율이 떨어지고 수령시기가 늦어질 수는 있지만 안정성 면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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