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잠언에 귀 열어야할 사람들

2002-05-2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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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서울에선

▶ 안영모(언론인)

김대중 대통령의 셋째 아들 홍걸씨가 검찰에 출두하기 전날 밤, 늦도록 읽은 책은 구약성서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잠언 편을 몇 차례나 읽고 낙서도 몇 줄 남겼다고 담당 변호사는 전했다. 어머니 이희호 여사의 간곡한 당부와 위로에 따른 것이란다.

새삼 잠언 편을 펼쳐보니 왜 이희호 여사가 아들에게 일독을 권했는지를 대뜸 알만했다. "사악한 무리의 꾀임"에 빠져 죄를 짓지 말도록 당부하는 구절이 가득함을 볼 때, 대통령과 자신의 마음이 꼭 저러려니 하는 짐작이 간다. 이희호 여사는 잠언 구절을 통해 아들에게 이렇게 이르고 싶었던 듯하다. "아들아, 어미의 가르침을 물리치지 말아라.-죄인들이 꾀더라도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너를 이렇게 꾀리라.

’같이 가서-온갖 값진 재물을 차지하자. 털어온 것으로 창고를 가득 채우자. 우리와 한 통 속이 되어 같이 먹고 같이 살자.’-그래도 아들아, 너는 그들과 같은 길을 가지 말아라.-"


김홍걸씨, 이제 40을 갓 넘은 용모가 훤칠한 이 젊은이는 그러나 불행하게도 꾀임에 넘어갔다. 아버지가 권좌에 앉자마자 주변에 모여든 "사악한 자들"의 꾐에 빠져 "값진 재물"을 "창고에 가득 채웠다"는 혐의로 쇠고랑을 차기에 이른 것이다. 밝혀진 ‘재물’만 15억원, US달러로 100만달러 플러스 알파다.

사업을 해 번 돈도 아니요, 복권에 당첨된 것도 아닌, 그야말로 "눈 먼 돈 챙기기"로 쌓은 재물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눈먼 재화가 아니었다. 합법의 탈을 쓴 권세와 불법과 허위와 날조와 은폐로 무장하고 이권을 찾아 나서 ‘눈’을 번득이며 쌓은 ‘도둑 재화’였다. 그를 꾀어낸 사악한 무리들은 누구인가. DJ가 그렇듯 총애했다는 최아무개, 그가 연결한 정권 실세들, 대통령 아들의 불법재화 모으기가 드러나자 슬쩍 덮어 준 청와대, 검찰, 국가 정보원, 금감원, 국세청, 경찰 내의 "한 고향 사람들"이다.

이희호 여사는 홍걸씨가 검찰에 출두하는 장면을 우정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한다. 그 상심함이 어떠했을까 알만하다. 죄는 밉지만 사랑하는 아들, 그것도 친 혈육(두 형은 전처 소생)이요 막내로 귀엽게 자란 아들이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서 기자들의 공격적 질문과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말만 하자 "국민에겐 할 말 없소?"라는 연이은 기자들 성화에 "죄송하다는 말씀드린다"고 속삭이듯 마지못해 답했다던가. 본인은 물론 대통령과 가족 전체의 불명예가 아닐 수 없다. 나라꼴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한데 여기서 의문은 제기된다. 사랑하는 아들이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갈 때까지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는 왜 미리 아들의 비리를 막지 못했을까? 모든 정보를 독점한 청와대와 정보기관이 홍걸씨의 비행을 몰랐을까?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지배적이기는 하다. 왜? 자기들도 비슷한 이권을 해먹었으므로. 반대로 청와대 측근들은 다른 말을 흘리고 있다. 아들 비리를 알만큼 알고 나무랐지만 듣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어쩌자고 훈계를 싫어하고 꾸지람을 우습게 여겼던가… 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다가 기어이 이 모양이 되었구나! 온 회중 앞에서 이런 변을 당하게 되었구나!’ 이 여사의 심정이 꼭 이 잠언의 한탄을 대신 말해주는 것일까.

그러나 반론도 있다. 대통령과 이 여사가 내막을 잘 알고도 애틋한 자식 사랑 때문에 눈감아 주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그건 분명 "눈먼 자식 사랑"임에 틀림없다. 성장 시절, 아버지 DJ가 정치적 탄압을 받고 수형 생활을 하는 등 자식들이 받은 수난에 대해 늘 미안하게 생각해 온 이 여사, 특히 DJ로선 아들들의 잘못에 대해 온정주의로 일관해 왔다는 것이다. 마치 요즘 젊은 부모들이 자식의 기를 살린답시고 오냐오냐하면서 키우는 과오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막내아들만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 둘째 홍업씨도 같은 길을 갈 가능성이 높고, 자칫하다가는 큰아들 김홍일 의원마저 비리 낙진을 쓸 위험이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들리기로는 그 동안 세 아들 사이도 크게 벌어졌다는 것이다. 두 형들의 간섭에 막내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와 관련된 말이다. ‘의 좋은 형제는 요새와 같으나 다투면 그 앙심이 성문의 빗장과 같다’라는 역시 잠언의 경구가 DJ의 삼 형제에게도 적용되는가-그렇다면 이 또한 가족의 더 큰 비운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마도 DJ와 이희호 여사는 지금 가슴을 치고 있을 지 모른다. "왜 진작 잠언의 말씀을 아들들에게 일깨우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들들과 조카와 측근들-DJ를 둘러 싼 많은 이들의 비리가 더 높은 곳을 향해 비화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고는, 문제의 진정한 원천이 어디인가 하는 본질적 의문을 제기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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