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One-down Position

2002-05-1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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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 포먼 칼럼

한번은 누이가 아팠는데 아무도 그녀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몰랐다. 여러가지 증세를 보였지만 확실한 진단이 없었다. 많은 의사들을 찾아다닌 끝에 그녀가 만성피로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명을 알게 되었다고 그녀의 상태가 나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후 그녀는 혹시나 이병에 걸린 것일까, 저 병에 걸린 것일까 하는 걱정에서 벗어났다. 이처럼 이름은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오랫동안 나는 한국사람들 특유의 대인관계 방법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특유의 행동을 무엇이라고 딱 꼬집어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었다. 얼마 전에 비교문화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이 특유의 행동을 설명하는 단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단계 낮은 위치 (one-down position)’라는 말이다. 다음 이야기는 ‘one-down position’을 그려주는 장면이다.

미스터 김은 고급 한식집 연회장을 예약하며 가격을 식당주인과 구두로 계약하였다. 식사를 마친 후에 종업원이 가져다 준 계산서는 주인이 전화로 말한 가격보다 훨씬 비쌌다. 미스터 김과 주인은 오랫동안 사업상 관계를 맺어온 사이이다. 만약 당신이 미스터 김이라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대부분의 미국사람들은 이러한 경우에 분명 주인을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왜 약속하였던 가격과 다르냐고 이유를 따질 것이다. 만약에 미스터 김이 단도직입적으로 따진다면 주인이 체면을 잃을 것이다. 미스터 김이 전액을 물게 되면 미스터 김이 체면 잃을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미국사람과 다르게 ‘one-down position’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을 보게된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주인의 체면을 생각하고 미스터 김은 조용히 주인에게 가서 식사가 맛있었다고 말한다. 미스터 김은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창피하여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라고 주저한다. 그러면 주인은 염려말고 말하라고 한다.

미스터 김은 계산서를 주인에게 보이면서 계약한 가격과 차이를 설명하며 자기가 초청한 손님들에게 보태어 달라고 말 할 수도 없고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주인에게 충고를 구한다. 주인은 그의 딱한 사정을 동정하면서 가격을 내려 준다.

만약에 미스터 김이 주인을 비난하거나 잘못을 지적하며 따졌다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도 못하고 서로 체면을 잃게 되어 오랫동안 유지해온 관계가 상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비교문화책 저자는 ‘one-down position’을 이렇게 설명한다. "상대방에게 자신의 약점을 보이면서 상대방의 도움이 없이는 자신이 창피를 당하게 되고 체면을 잃게 된다는 것을 상대에게 말한다. 자신이 상대방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위치에 서서 부탁을 한다."

체면을 중요시하는 문화에서 서로의 체면을 잃지 않도록 배려하여 주는 것이 중요한 처세술일 것이다. ‘One-down position’은 한국사람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취하는 처세술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상대와 동등한 입장에 서서 관계를 맺는 미국사람들에게는 상대보다 한 단계 낮은 위치에 서서 행동한다는 개념은 아주 낯설다.

작년에 한인들과 아프리카 선교 중에 생겼던 문화충돌 사건이 떠오른다. 우리 팀 멤버 중에 나이가 든 한국 남자가 있었는데 그의 돌출적인 행동 때문에 팀 활동에 지장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는 ‘언제 어디로 쏘는지 모르는 대포(loose cannon)’ 같았다. 정말로 ‘청개구리’였다.

나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을 팀장의 입장에서 미국식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따졌다. 그의 행동은 바뀌기는커녕 오히려 악화하여 나머지 활동기간 그는 나를 외면하였다.

그때 내가 ‘one-down position’에 서서 그와 상담을 하였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있다. 만나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다 지속되는 것은 아니겠고 사람끼리 충돌없이 살수는 없지만 ‘one-down position’은 충돌을 회피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다. 아쉽게도 이와 같은 충돌해결방법이 미국사람인 나에게는 너무나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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